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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Feb 13. 2024

사주가 미래를 알려줄까?

내가 생각하는 명리학의 진짜 효용

사주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은 반드시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주 주인의 일면을 비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관점으로 한 사람을 조명할 수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그는 천태만변의 존재가 된다. 사람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이기 때문이다. 사주 역시 그러한 하나의 관점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주가 전제하는 맥락에서는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주를 통해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유념해야할 것은 틀리면 어떡하냐는 생각이 아니라 그래서 이것으로 사주 주인에게 어떠한 임팩트를, 어떠한 솔루션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과거 맞히기? 그건 무당이 더 잘한다. 맞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포 형성? 따뜻한 마음과 거기에서 비롯된 미소가 결여된 기술적 라포형성은 의미가 없다. 신뢰감 형성? 과거도 맞히고 현재도 맞힌다면 미래도 맞히겠노라는 단순한 논리? 그것은 인간은 100% 운명에 끌려다니는 피동적 존재라고 단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 인간은 운명에 지배받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명리학은 미래를 찍어 맞히라고 만들어진 학문이 아니다. 사주는 큰 틀을, 큰 경향성을 제시할 뿐이다. 0과 100처럼 양극단의 이분법적 결과를 제시하는 게 사주가 아니다. 심지어 타로나 주역으로 점을 쳐도 YES or No의 답변을 얻으려고 점을 치는 건 우매한 것으로 본다. 모든 미래를 다 내다볼 수 있다면 명리학자들이야 말로 LH 직원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토지를 다 매입하여 시세 차익을 거뒀거나 비트코인의 폭등을 예견해서 거부가 되었어야 맞다.


그렇다면 결국 명리학의 효용은 무엇인가. 내 짧은 식견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것은 지금, 현재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준다는 데 있다. 지금의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명(命)이라는 에너지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운(運)이라는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어떠한 작용을 해나가는지를 보여준다. 고맙게도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까지 기록으로 보존해두었으니 매우 감사한 도구가 아닐 수 없다.


혹자는 명리학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일이 잘 풀리는 날과 그렇지 않고 꼬이는 날들의 특징들을 명리학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면밀히 기록하며 그 속에서 자신만의 패턴을 발견하고 그런 패턴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들에 대한 가설까지 세우고 스스로 검증해나가기도 한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자는 이미 자신만의 '명리'를 터득해 나가는 중인 셈이다. 그게 진짜 명리학자다.



갑을병정, 목화토금수를 그저 문자로서, 지식으로서 아는 게 명리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 삶에 대한 진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로써 접근할 때 진정한 '명리'를 구하는 전제가 성립된다. 소위 미래 예측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이치를 파악했을 때 부산물처럼 따라오는 것이지 명리학의 존재 이유도, 목적도 아니며 그리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대전제가 성립되지 않은 자들이 명리나 점술을 혹세무민의 도구이자 음지의 신변잡기로 전락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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