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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Feb 05. 2024

甲辰年 丙寅月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2월 1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4.01.29 (월) 


(..)

AI 시대에는, 아니 비단 그런 시대뿐만 아니라 시대를 막론하고 메타인지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언제나 살아남았다. AI 시대에는 그에 걸맞게 새로운 표현과 부가적인 특징으로 마치 전에 없던 이 시대에만 요구되는 특징들을 지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겁(?)을 주는데, 여기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 


중요한 내용은 얼굴을 달리해서 계속 반복될 뿐, 실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호들갑과 공포심, 조바심을 조장하는 메시지들은 대부분 허위, 과장된 것들이 대다수이고, 막상 그들이 예견하는 절망적 상황이 오지 않더라도 그들은 '아님 말고' 정도의 책임감(이라고 하기도 뭐 할 정도로 하찮은) 밖에는 지니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에 언제나 주목해야 한다. 변화가 급속도로 일어나는 시대일수록 더더욱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사유와 이해를 우선시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중 하나는 인간이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다만 욕망을 해소하는 방식만, 그리고 해소에 대한 자유도와 적극성의 정도만 시대별로 양상을 달리해왔고 달리 해 갈 뿐이다. 


(..)

저마다 시력이 다르면 보이는 게 달라지듯 누군가에겐 당연한 관점이 다른 누군가에겐 도무지 보이지도, 와닿지도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인간이 지닌 개별적인 믿음에서 비롯될 것이다. 믿음의 힘은 이토록 강력해서 때론 대단한 일도 하게끔 만들지만 때론 무서우리만치 한 개인을 좀먹고 끝내 무너뜨리고 만다.


도구는 언제나 양날을 지니고 있어서 목표를 벨 수도 있지만 나를 벨 수도 있다. 내 앞에 놓인 다양한 아이템들 중 나는 어떤 것을 언제, 어떻게 보고 듣고 익히도록 배치를 해야 할까.



24.01.31 (수)


(..)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요!'

이건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두 번 죽이는(?) 아주 좋지 못한 방식의 감싸기이다. 자초지종은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인간사에는 100 대 0 혹은 0 대 100의 일방 과실만 존재한다고 보는 시각. 적어도 우리 아이는 그 100에 해당하지 않을 거란 무조건적인 믿음. 양극화와 초개인주의라는 시대정신(?)은 비단 젊은이들만의 고유한 특징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내겐 놀라웠다.


알고 보면 별일 아닐 수 있는 것에도 우린 쉬이 얼굴을 붉혀가며 싸운다. 무엇이 그리 중했길래? 중요한 신념을 지키기라도 했던 것일까? 불의에 맞서 항거라도 하려 했던 것일까? 그건 아니다. 우린 그저 자기 자신을 지켜내고자 얼굴에 아궁이보다도 뜨겁게 불을 지피고 혀끝은 날카롭게 벼린다.  나만 지키면 되기 때문에 나로 인해 상대가 무너지든 죽든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이.


인간은 자신이 내놓은 것에 대한 자각은 전혀 없는 채로, 오직 상대가, 사건이, 상황이 내게 입힌 피해에만 더 극적으로 반응한다. 아무리 인간이 본능적으로 득보단 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물이라고 해도, 그것은 동물로서 인간을 말할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우린 언제나 이 동물적 본능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어야 하며 이것을 드러낼 때와 조절할 때를 구분할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

'나'가 없는 삶은 여태까지는 생업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어떻게든 뒤로 미루며 괜찮은 척 포장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사라지는 본인의 '나' 이외의 겉가지들을 속절없이 바라만 보며 인간은 존재론적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늘 중요했지만 늘 뒷전이었던 바로 스스로의 실존에 대한 직면과 고민은 이제 모두의 불가피한 과업이 되었다. 이번에도 이것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사람은 '존재론적 무(無)'의 상태를 면치 못할 것이다.


다만 그와 내가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무(無)'에 대한 해석이다.  그는 그건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로봇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니 로봇에 대체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너무 성급한 결론이다. 가출한 자녀를 그 즉시 호적에서 파 버리는 극단적이고 충동적 우를 범한 셈이다. 인간은 늘, 설령 쉽지 않더라도,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간과한 발언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기적은 늘 존재한다. 로봇에 발생하는 예외는 6시그마 이론 등을 이용하여 제거해야 할 대상일지는 몰라도 인간, 더 넓게는 생명체 전체에 있어 변수라는 것은 환경의 격동에 적응을 가능케 한 묘수와도 같았다. 그러한 변수는 삶에는 고정불변의 상태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는 귀중한 존재이기도 하다.


무(無)에 치달은 인간은 변하게 되어있다. 그게 '실재'의 존재방식이다. 그 속도와 방향이야 뭐 어찌 되었건 간에 말이다. 양생음사 음생양사.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나오고, 그 역도 성립한다. <주역>에서도 말하길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영원하다(궁즉변 변즉통 통즉구)고 했다. 바닥을 치면 반등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어있다.



24.02.04 (일)


(..)

나라는 사람을 학습시키고 똑같은 상황에 똑같이 말할 정도로 자아를, 정확히는 우리가 '자아'라고 일컫는 존재가 펼쳐내는 사고, 행동의 방식을 고스란히 복제하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어렵지 않은 일 같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럼에도 한 끗 차이, 인간과 AI로 복제된 자아 상에는 매우 중요한 한 끗의 차이가 존재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AI가 나타난 이상 이것의 발전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변화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이것과 어떻게 현명하게 공존하고 나아가 그것으로부터 인간 삶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이제야 인간이 인간답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과 좋아하는 것이 일치될 수 있는 시대가 오게 됐다고 반기며 말한다. 좋은 시나리오다. 모두가 마음과 영혼이 일치되어 사는 시대란 유토피아에 가깝다. 그러나 다른 시나리오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1984>나 <매트릭스>에 묘사된 디스토피아적 결말. 


둘을 가르는 지점은 인간이 인간다움에 더욱 집중하느냐, 아니면 AI와 경쟁하려고 하거나 AI를 이용하는 기술만을 습득하느라 여태껏 벌여온 과오- '자기 소홀'-를 다시금 반복하느냐에 달려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를 깨닫는 것은 언제나 중요했다. 그 가치는 불변한다. 다만 사회적인 규약과 시대의 정신이 그것에 물질적인 가치를 부여함이 달랐을 뿐이다.


(..)

개소리든 뻘소리든 이곳은 놀이터다. 마음껏 내 머리에 드는 생각을 흩뿌려라. 모든 것은 신호고, 상징이고, 느낌이며 저마다의 존재 이유가 있나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역동적인 흐름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지 따지고 분석해가는 것에만 천착하는 게 되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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