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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an 25. 2022

[주간단남] 1월 4주 차 아침 생각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1.16 (일)


(..)

결국 그것을 준비한 이유가 즐거움 때문이었다기보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두려움에서 촉발된 동기는 지속 가능성이 없다. 사람을 움직이게는 만들지만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모습이다.


(..)

모든 행동의 원인과 동기를 개인이 찬찬히 살펴보고 순수한 즐거움과 열정만으로 움직이는 것들로만 추려서 인생을 향유할 수 있다면 삶은 정말이지 아름다움과 황홀함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 그렇게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기분만을 경험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선은 바로 톨레의 가르침을 떠올리는 것이다. 깨어있는, 의식적인 행동의 조건 중 첫 번째인 '받아들임'을 말이다.

어떤 행동을 즐거움이나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하고 싶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그 일을 하기로 했거나 해야만 한다면, 일단 한다.

그것을 하지 않았을 때의 시나리오를 자꾸 떠올리는 행위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행한 삶이 펼쳐지는 출발점이 된다.


(..)

짜증이면 짜증, 우울이면 우울, 두려움이면 두려움.

무슨 감정이나 생각이 내게 찾아오든, 내 마음의 방에 찾아온 손님이라 여기며 안으로 초대하라.

그 손님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경청하다 보면 손님은 이내 흐뭇함을 느끼고 떠날 것이다.


그러나 그를 문전박대하거나 잡아서 무의식이라는 깊은 지하감옥으로 가둬 버린다면, 그는 매일 밤낮을 울어대면서 나의 내면의 세게의 맑은 하늘을 어둡게 만들어 버릴 것이리라.


(..)

특정한 감정만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고 느껴주고 흘려보내는 것.

흘려 보낸다는 것은  만물은 변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깨우치는 행동이다.

기쁜 것은 놓지 않으려 하고, 슬픈 것은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못하도록 방지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언제나 헛수고가 될수밖에 없는 이유다.


(..)

어쩌면 우리가 글을 쓰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독자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글이라면, 중요한 것은 그 표현 수단 자체인가, 아니면 표현의 대상인 생각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글쓰기의 스킬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과, 생각을 더욱 예리하고 날카롭게 벼리는 작업에 방점을 찍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

사실 그 둘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를 갈고 닦으면 다른 하나도 뒤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닭이냐 달걀이나 하는 논쟁은 아무래도 좋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배우자.




22.01.17 (월)


(..)

삶에서 이따금씩 찾아오는 후회와 의심과 두려움과 불안은 모두 자신이 살지 않은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우리 머릿속 상상에서나 존재하는 이론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는 일생에서 결코  번의 삶을 경험할  없다.


(..)

이 순간은 오직 단 한 번 존재한다. 이것은 매우 공평하고 예외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따라서 우린 매 순간마다 내리는 크고 작은 결정들의 총합이다. 그렇게 각자만의 단 하나의 삶의 지도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 곧 삶이다.

그 지도가 좋든 싫든 그것에 대한 감정은 우리의 해석일 뿐.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지도는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이며,  누구의 것과 비교해도 같은 것을 찾아볼  없다. 그리고  누구도 지도의 완성을 대신해 줄수도 없다.


(..)

하나의 선택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을 때의 인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의 삶을 이끈다.

겉으로 보기에만 당장 티가 나지 않을 뿐.


(..)

내 삶이라는 도화지의 주인이 오직 나 하나라면,

지나친 신중함으로 선택을 유보하며 갈팡질팡하기보다는 우연이 주는 힘을 믿고 가슴이 끌리는 선택을 내리며 살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우연이 쌓이면 필연이 되고 그것이 모여 운명을 이룬다.


(..)

삶에 있어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공식 따위는 없다.


자신감이나 자존감이라는 단어조차도 근본적으로는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만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자존감이나 자신감 따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온전히 존재하겠다는 굳은 결심이다.




22.01.18 (화)


(..)

예전처럼 10시 이후로 전자기기를 멀리하던 삶으로 되돌아가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요즘이다.


(..)

손에 힘을 뺀다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


(..)

별 수 있나. 내가 계속 그런 매커니즘으로 손에 힘을 나도 모르게 주게 된다는 것을,

그것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는 수밖에.




22.01.19 (수)


(..)

나는 여전히 인정 욕구가 높은 사람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를 부정할 생각도 없고 외면할 생각도 없다. 그저 알아차리고 그것이 거기 존재함을 인정해주자.


(..)

나는 그저 모든 감정들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이자, 플랫폼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

탈고를 하는 순간 나는 개발자들이 소위 말하는 '버전관리'처럼 '나'라는 사람의 하나의 버전을 만드는 셈이다. 그건 내 생에서의 어느 시점에 대한 비교적 긴 호흡의 기록물이다.

어떤 종류의 기록물이든, 창작물이든 그것은 그 순간의 나를 거쳐간, 나라는 껍질을 통해 드러난 영혼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많이 기록하고 더 많이 창조해야 하며, 이를 위해 더 많이 경험하고 삶을 즐겨야 한다. 즐긴 만큼 우리 안의 영혼도 무럭무럭 자랄 테니.

우리는 내면에 있는 저마다의 창조성이라는 어린 영혼의 양육자다.


(..)

삶이란 곧 자신의 영혼을 돌보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렇게 펼쳐질 때 저마다의 삶은 각양각색으로 다채롭게 빛날 것이다.


(..)

욕심 많은 소위 '윗사람들'이 깨우치길 바란다.

'그들'이 현재 당연하다고 믿는 세상은 점점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달리 사는 법을 몰랐기에 시스템의 족쇄임을 알고도 제 발에 채울 수밖에 없었던 모든 사람들이 깨어나 거리를 활보하는 자유시민이 되었을 때,

'그들' 탐욕을 위해 몸을 불살라 일할 사람은, 돈만 주면 뭐든지  하던 사람들은   명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것에 매진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

아티스트웨이는 사람들을 이러한 '새로운 지구'로 오게끔 건네는 일종의 초대권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더 큰 세상의 존재를 깨닫게 할 마중물 역할을 한다.




22.01.20 (목)


(..)

충동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충동이 일어남을 알아차릴 새도 없이 정신을 차려보면 그것에 지배당한 뒤라는 점이다.


(..)

국궁을 하는 젊은이들이 제법 있었고,

그들이 꽤나 빨리 성장하는 모습들을 보며 마음이 더 급해짐을 느꼈다.

아니, 왜? 애초에 그저 활을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나? 그런데 어느새 난 그 목적은 잊어버리고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조바심에 휩싸여 있었다.

여기에서도 남들에게 진다는 것,

즉 평균 이하의 존재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를 움직이는 것이 두려움인지, 즐거움인지를 언제나 잘 감지하고 알아차리도록 하자.




22.01.21 (금)


(..)

꿈에서 사람이 불온한 짓을 저지른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물론 인간에게는 저마다 악한 모습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꿈속 악행의 빈도가 너무 잦다면? 꿈속 세계와 현실세계 간의 괴리가 너무나 크다면?

그는 기실 두 발은 현실에 딛고 있을지는 몰라도 마음만은 늘 붕 뜬 채 자신을 꿈속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보여줄 무의식 속 생각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의 생각들이, 감정들이 현실을 빚어내는 영사기 속 필름 같은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무의식에 대한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에 대한 자제력을 기를 수 있는 훈련법을 익혀야 하는 것 아닐까?


(..)

자신의 마음을 돌봐야 한다.

점점 그런 필요성을 자각하는 개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22.01.22 (토)


(..)

요즘 나의 '이키가이'는 자격증 준비다.

그리고 귀여운 중고차를 하나 끌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주, 타로 상담 여행을 하는 것이다.

어제 이 얘길 하는데 내 눈빛이 아주 빛이 나더랜다.


(..)

미래에도 생업은 계속 존재하겠지만,

돈을 떠나서도 스스로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만드는 일도 노동으로 포함시켜야 한다.


사람들은 쳇바퀴 같은 삶의 굴레에서 지친 나머지, 로또라도 맞아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지쳤으며,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일 뿐이다.


실제로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평생 살 수 없다.

누적된, 해소되지 못하던 욕구들이 풀리고 나면 인간은 반드시 무언가를 찾아 헤매게 된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생명력으로 가득 찬 존재이기 때문에 뭔가를 창조하려는 정언 명령과도 같은 속삭임이 안에서 들려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

시류를 맹목적으로 좇기만 하는 삶에서는 인간 내면에 꿈틀거리는 본성인 창조성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남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 두려워 위축되고 주눅든 마음 역시도 창조적 에너지의 발산을 막는다.

나의 모토는 그런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며 사는 삶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그들에게 모종의 영향을 끼치고, 나 역시 그 과정에서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는 삶.


그런 상생의 구조가 이뤄진다면, 그 누군가가 될 사람 역시 자신에게 남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누구에게나 이런 에너지와 능력, 잠재력이 있다) 깨닫고는 이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겉으로 보기엔 당장에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내부에 세팅된 '입력값'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똑같이 도로 위를 달리고 있지만, 네비의 목적지 자체가, 혹은 같은 목적이였어도 경로가 바뀌는 것과 유사하다. 이를 두고 우리는 '변화'라고 일컫는다.


그런 선물을 제공하고 싶다.

내가 어딘가에서 사서 주는 그런 선물 말고, 각자가 이미 내면 깊숙한 곳에 태초부터 지니고 있었던, 각자의 삶에서 가장 값 비싸며, 아니 함부로 값을 매길 수도 없는, 모든 창조의 근원이 될 바로 그것. 그것을 함께 발견해 내는 친절한 안내자가 되고 싶다.


나의 네비게이션 설정값은 이미 그렇게 입력이 되어 있으며,

 목적지를 향해서 오늘도 나는 달려나가는 중이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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