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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an 31. 2022

[주간단남] 1월 5주 차 아침 생각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1.23 (일)


(..)

요새 다시 아침 기상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아니면 혹시 내가 기상시간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조금 늦게 일어나면 어떻고 일찍 일어나면 어때. 이걸로 개인의 부지런함 정도를 측정하는 건 지극히 1차원적인 발상이다. 게다가 부지런함의 정도를 꼭 측정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는 부지런하는 것이 좋고, 그렇기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내 안의 관념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밖에 되지는 않는다.


(..)

나는 왜 학창 시절이 모티프인 꿈을 자주 꾸는 것일까?


(..)

그땐 겉멋에 취해있어 큰 착각에 빠져 살았다. 그 역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란 것을 그 당시엔 결코 알 턱이 없었다.


(..)

감정정 정화, 대청소는 감정을 마주할 기회가 올 때마다 게속해서 직시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22.01.24 (월)


(..)

우리는 언제나 대상을 바라봄에 있어서, 특히 그 대상이 사람일 때는 더더욱,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아야 한다. 만일 누군가의 특정한 면이 좋아서 만나기로 했다면,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있는 각오를 해야하는 것이다. 좋은 점만 똑 떼어 취하려는 것은 사람을 무슨 뷔페 음식점이라도 되는 듯 생각하는 격이다.


(..)

브랜드란 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의 소유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일까? 옛부터 인간은 꾸미려는 본능이, 특히 그 자체에 즐거움을 느껴서라기 보다는 그것이 밖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를, 그것이 나에게 주는 정체성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자신의 몸에 장착하기 시작했다.


(..)

브랜드가 아니라 기능이 좋아서, 단순히 예뻐서 샀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실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진짜 목적은 바로 그것을 통해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함에 있다. 남들보다 더 우위에 서려고 하는 심리, 암컷을 차지하려고 서로 경쟁하는 수컷들의 원초적인 본능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그 마음. 상황이 이러하니 흔히 마케터나 사람 심리를 파고드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사람은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 감정과 본능에 지배 당하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

아무리 자세에 모범 답안이 있다고 해도 내 몸에 적용할 땐 달라진다. 아주 미세한 차이일지라도 내 몸에 맞도록 개인화 작업을 해야하는 것이다. 펜을 쥐는 자세든, 활을 쏘는 자세든, 하루하루를 보내는 방식이든,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자신만의 방식이 생길 때까지 조급해 하지 않고 차분함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기초에서 출발하되, 정진하고 연구하고 생각해 보고 발전시키며 나만의 것을 쌓아 나가자.


(..)

그것을 시행착오라고, 사치라고 부르지 말자. 그것은 그저 꼭 필요한 관문이며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행동해 나갈 때 우리는 각자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의 발로이다.




22.01.25 (화)


(..)

몸의 소리, 그리고 마음의 소리까지 잘 듣기 위해서는 언제나 마음의 중심에, 플랫폼에 가만히 앉아서 플랫폼 내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들을 관찰해야만 한다.


(..)

머릿속, 가슴속의 그 말을 표현함에 있어 우리는 순간적이고도 연속적인,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선택의 과정을 밟는다. 어떤 단어를 쓸지, 어떤 문장 구조로 쓸지가 의식적이라기 보다는 거의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그 과정에서 일부만이 의식의 관할 영역으로 할당이 되고, 그제서야 우리는 어떤 기준-그 기준이 명확하든, 단지 감에 의존하는 것이든-에 따라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런 일부의 의식적인 선택의 질에 의해 해당 단어, 문장, 그리고 나아가서는 글 전체의 질이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그것은 어느새 무의식의 영역으로 이관된다. 이것이 무의식과 의식이 서로 협력하는 모습이 될 테다.


(..)

나는 자칭 비주류라고 하지만 만물이 그렇듯 이 역시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나는 여전히 지극히 메인스트림으로 보일 것일 테니. 지금 누가 누가 더 비주류인가를 두고 경쟁을 하자는 게 아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세게는 없는지, 보고도 외면하고 있는 세상은 없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

우리가 언제나 잠정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자신 스스로에 대해 옳음이 아니라 그름을 베이스로 깔고 세상을 둘러볼 때 더 열린 사회로 갈 수 있는 포문이 열릴 것이다.




22.01.26 (수)



(..)

참 신기한 일이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어떻게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살지를 이미 지금보다도 과학 문명이 훨씬 발달하기 전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우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과학 기술에 의존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자신들의 본능과 직관에 더 의존했을 것이란 점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남들이 이룩해놓은 것이 풍부해질수록, 반대로 우리의 사고는 더 얕아진다.


(..)

사주에서도 특정 기운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결국 그것이 지나치게 부족한 것과 마찬가지로 보는 과유불급의 원리가 적용된다. '다다익선'은 인간의 탐욕이 반영된 표현일 뿐, 실제의 자연은 과유불급의 원리가 적용된다. 자연 존재의 핵심 원리가 바로 균형과 조화에 있기 때문이다.


도처에 정보들이 널려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조선시대 사람들보다도 우리는 머릿속에 든 것이 없을 것이다. 인터넷이 다 찾아줄 테니까. 간단한 정보의 암기를 기술에 위임하고, 그 빈 자리를 더 나은 것으로 채웠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 머릿속에는 무언가를 더 살 생각, 주식 차트 생각,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 갑자기 막연한 미래가 두렵다는 생각들로만 뒤덮여 있다. 고작 이런 생각들을 채워넣으려고 높은 수준의 문명 사회를 이룩한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문명의 발달은 결국 개개인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공공선을 추구하는 선한 목적에서 일어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욱 촘촘하고 체계적인 구조하에서 아주 교모하고 은밀하게 사람들을 시스템 하에 묶어두기 위해 진화해 온것이 바로 문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기실 현대판 신분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스템에서 자유로운 자들, 시스템을 설계한 자들이 있고, 시스템에 종속되어 편리를 누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곳에 매여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로 나뉜다.




22.01.28 (금)


(..)

인사라는 건 모름지기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의 다리를 놓는 첫 작업이다. 인사를 통해 우리는 내가 여기에 있음을 알리고, 상대가 거기에 있음을 알아봐준다. 인사 없는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투명인간 혹은 보이지 않는 공기 정도로 인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안정의 반대인 불안정은 인간이 아주 오랜시간 전부터 살아온 환경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는 생존과 번영을 위해 그 반대 상태를 갈망하고 지향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삶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가깝거나 먼 미래를 내다 보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쉽게 자유로워 질 수가 없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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