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Mar 14. 2022

[주간단남] 3월 1주 차 아침 생각

22.03.06(일) - 22.03.12(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3.06 (일)



(..)

아직 나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소위 말하는 '음모론'인지 가려낼 재간이 없다. 공교육에서 배우지 않았던 세상에 대한 더 넓은 지식과 지혜를 충분히 갖춘 뒤에야 그나마 시시비비를 가려볼 눈이 생겨날 것이다. 정돈되지 않은 정보들이 우후죽순으로 넘실거리는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 대신, 차분하게 잘 정리된 여러 문헌들을 통해 잠시라도 알고리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갈등과 반목 없이 인류 역사는 진보할 수 없는 것인가? 이 갈등과 반목은 자연적인 흐름인가, 아니면 이마저도 '그들'의 대본 하에 일어나는 일들일 뿐인가? 모든 것이 대본이라면 이 중에 어떤 입장을 취할지 개인이 선택한다고 믿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제아무리 자발적으로 고른 것이라고 한들, 선택지를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니라 주어진 범위 안에서만 택해야만 하는 것을 진정한 의미의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

내 상식으로만 보면 시야에 불순물이 낀다. 상식은 함정이고 색안경이다. 그들이 보게끔 허용한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허수아비와도 같은 존재로 전락시키는 안대와도 같다. 상식을 버려라. 그것에서 자유로워져라.


(..)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아직도 막막하지만, 이런 것도 다 삶이 내게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혼란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혼란 속에서도 생명체로서의, 전체의 일부인 존재로서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 경험하는 주체인 '의식'으로서의 자각을 잃어버리지는 말자. 그것이 나를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주리라. 언제나, 언제나 빛은 존재하고 희망은 있으며, 길은 구하는 자에게 절로 열리기 마련이다.



22.03.07 (월)




(..)

오랜만에 서로가 함께 각자의 모닝페이지를 쓰고 있다. 이 고요의 시간. 해가 뜨기도 전, 양(陽) 기가 가득한 이 시각에 우리 둘은 각자의 내면으로 차분하게 침잠 중이다. 지금 이곳은 서로가 노트에 글씨를, 아니 서로의 내면을 옮겨 놓는 소리 외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이 시간 이 장소에서 같이 모닝페이지를 쓰는 우리 둘의 내면은 서로 공명하고 있지 않을까.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그렇다. 밥을 함께 먹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산책을 하거나 하는 일상의 사소한 행위가 그럴진대, 하물며 이토록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행위를 함께 할 때 그 공명의 정도는 더욱 증폭될 것이다.


(..)

What is Real? 영화 매트릭스 속 이 대사가 요즘 나의 화두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가? 어디까지가 모두에게 공개되고 합의된 정보이고 어디까지가 일부만이 보는 조작된 정보이며, 또 어디까지가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실인가? 진실은 순수한가? 혹은 추악한가? 그것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는 기준은 그러면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시대와 상황을 막론하고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원리나 가치가 존재하는가?


(..)

어디까지가 내가 하던 생각이고, 또 어디까지가 불현듯, 지금껏 해보지도 않았는데 적어내려가다 보니 줄줄이 딸려 나오는 '전체'로서의 '나'로부터 나온 것인지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언뜻 보면 그냥 내가 한 생각이니 내가 적었겠거니 할 수 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그렇지가 않다. 글이든, 그림이든 우리가 뭔가를 표현하는 순간은 그런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던 것들과, 그것들에 의해 딸려온 여러 가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데 낯설지만은 않은 것들의 뒤섞임으로 우리의 손안에서 새로운 것으로 탄생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창조의 순간이리라.




22.03.08 (화)



(..)

매일의 컨디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인 수면의 질은 내가 평소 먹는 음식과, 평소에 하는 생각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게다가 그 생각과 감정, 그리고 먹는 것 사이에는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다. 특정 생각/감정을 느끼면 특정 종류의 음식이 먹고 싶어진다. 이는 영양학적 관점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학습된 결과에 가깝다. 그런 음식들이 신기하게도 건강에 좋은 것보다는 자극적인 식품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음식들이 그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그런 종류의 음식이 당기게 하는 감정이나 생각이 더 잘 드는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 내 직관에 따른 추정이다. 그래 한 단어로 뇌피셜.


(..)

시스템은 결코 개인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다. 개인의 평화와 안녕을 바라지 않는다. 근데 도대체 왜 많은 사람들은 당국이, 시스템이 자신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구원해 줄 거라 믿는 걸까? 시스템은 단지 우리를 '필요'로 할 뿐이다. 사회적 계약 당사의 관계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게다가 계약을 가능케하는 계약 당사자 간의 '상호 간 신뢰'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게 된 지 오래다.


(..)

바라고 원하기에 그저 의도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다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최종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고 오매불망 그것을 기다리기만 한다면 과정을 놓친다. 결과만 기다리는 사람은 포기도 빠르다.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매 순간을 최종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다 보니 '오늘도 안돼'가 자꾸 쌓이게 되고, 지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22.03.09 (수)



(..)

인간이 하는 상상은 무한하지만 동시에 특정 구조들이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기존에 비슷한 컨셉을 차용한 여러 신화들과 같은 이야기들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을 계속해서 소급하여 올라가 본다면, 최초의 컨셉 제작자(?) 역시도 무엇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그런 컨셉을 떠올렸을 것이다. 결국 그 영감의 원천은 다름 아닌 모든 것이 존재하는 우주이다.


(..)

경험해 보지도 않은 대상에 대해서 마치 알고 있다는 듯 마음 편히(?) 술술 내용을 적어내려 가는 이것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사실 대단한 존재이고, 모두 어딘가에 연결된 존재라는 것. 우리가 보는 세상 너머엔 더 넓은 진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에 대한 높은 가능성일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22.03.10 (목)


(..)

투표 결과는 어김없이 이 사회가 여전히 단절되고 양분화되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이 양당체제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솔직히 말해 말이 양당이지, 둘이서 짜고 친다면 독재나 다름없는 구조 아닌가?


(..)

어쩌면 이제 좌우 논리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세상인지도 모른다. 세계가 단 하나의 이슈로 이렇게 오랜 시간 골머리를 앓았던 적이 현대 인류 역사에 있었던가? 코로나19는 본 운동의 첫 번째 세트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크고 광범위한 세계적인 이슈가 우리의 일상을 또 한 번 잠식할지 예상하기 어렵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화합과 양보의 자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어찌하여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풍토는 사라질 줄을 모르는가.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별 수 없는 특징인 것일까. 추악한 본능을 가리는 우아함이라는 탈을 쓰고 있을 뿐, 그 이면엔 동물적이고 이기적인 생존 욕구만 앞세우는 것이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민낯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 해야만 하는 것은 각자가 가진 인식과 관점을 더욱 강화하고 공고히 하는 대신, 매일 조금씩 더 유연하고 새로워지는 것뿐이리라.


(..)

무의식적으로 삶을 영위하게 되면 모두가 이토록 본능 위주의, 생존과 번영이 최우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상황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상황과 무관하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 행동을 '선택'할 수 있으려면 언제나 의식이 잠들지 않게 힘써야 한다.


(..)

변화는 눈치채기도 어려운 작은 것들이 쌓이다가 임계점을 넘어섰을 때야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인류의 역사는 임계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일 것이라 믿는다. 지금의 나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언제나 차분함을 잃지 않도록 내면을 살피고 가꾸는 데 힘쓰도록 해야겠다.




22.03.11 (금)


(..)

거절, 혹은 그 밖의 다른 부정적 반응에 대해서 방어적으로 속단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마 그것은 받을 상처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발버둥 치는 내 에고의 작품(?)이리라. 요즘 글을 너무 안 썼다. 완벽주의, 즉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적당히 잘 짜인 완성된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 별로인 글을 쓰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키보드 위의 손가락의 춤사위에 제동을 건다.


(..)

머리론 알지 않는가. 그런 시선에 휘둘리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다는 것을. 하고 싶은 말, 드러내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게 설령 에고의 왜곡되고 비뚤어진 동기에 의한 것일지라도 과감하게 드러내자. 그렇다면 세상이 내게 필요한 것을 응당 줄 것이다. 쓰디쓴 피드백이라면 약이라고 생각하고 삼키고, 달콤한 피드백이라면 영양만점 식사라 생각하고 감사히 받아들이자. 어떤 반응이 오든, 심지어 무반응조차도 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그런 피드백들은 애초에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글쓰기의 목적이 그것으로 얻어지는 부수적인 것들-가령 긍정적 피드백이나, 부나, 명예 등-에 있다면 글은 수단이 되고 만다. 수단화된 글쓰기에서는 결코 그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


(..)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아마 책을 내고 나서부터일까. 나도 모르게 글 자체보다 글에서 오는 긍정적 피드백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 같다. 글감이 떠올라 키보드 앞에 앉았다가도 조금이라도 잘 써지지 않으면 긍정적 피드백에 대한 가능성을 혼자 가늠해버리고 다음에 더 좋은 영감이 떠오르기를 고대하며 미뤄버리기를 여러 차례. 그렇게 흘려보낸 미약한 새싹과도 같던 영감과 글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

창조성이 억눌리고 막혀있는 현재의 나 자신의 상태를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고만 있었다. 인정하자. 사회가 주입한 '그거 해서 돈 좀 돼?'라는 폭력적이고 획일적인 메시지를 나 역시 입으로는 비판하면서 속으로는 여전히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긍정적 피드백이 곧바로 돈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닌데 그것에 내 글쓰기의 동기가 영향을 받는 것은 어찌 보면 타당하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이 글로 당장에 돈이 벌리는 도 아니라면 내 이미지라도 좋게 할 수 있도록 긍정적인 반응이라도 얻을 수 있어야지! 안 그러면 그 시간에 공부나 하고 책이나 읽으며 내공을 더 쌓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더 나은 때를 도모하자.'라는 흔해빠진 레퍼토리 아닌가.


(..)

벗어나고자 해도 지독하게 고착화되고 내면화된 사회의 메시지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 이것이 세뇌가 아니고 무엇인가? 개인의 사고의 기본적인 세팅 값이 사회에서 주류가 되고 있는 담론들로 세팅되어 개인의 사고의 폭을 제한하고 그 형태와 결과물을 획일화 시킨다면, 설령 그 과정이 제아무리 자발적이며, 어떤 외압도 있지 않았다고 해도 세뇌인 것이다.




22.03.12 (토)


(..)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러므로 그것을 그냥 잊고 외면하며 부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태함과 나약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은 마치 특정 시점에 발견한 누군가의 특질을 보고 그 사람이 앞으로도 평생 그러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고 속단하는 것의 동의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부터가 스스로를 변화시켜본 경험이 전무하거나 잠깐 시도해 봤다가 되지 않는 것을 두고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결론지어버린다는 점이다.


(..)

자기 생각에 지나친 확신을 가진 사람은 무서울 정도로 강한 추진력을 보인다. 좌우 시야를 차단한 경주마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차단된 시야는 곧 삶의 다양한 서사를 볼 줄 아는 넓은 관점의 상실을 의미한다. 추진력과 지혜를 동시에 갖추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 생각이 언제든 틀릴 수 있으니 넓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어떻게 앞뒤 따지지 않고 불도저와 같이 돌진하는 기세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는 넓은 시야로 세상을 조망하고 비추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기에 제격일 것이다.





[주간단남]

첫 번째 글(21년 6월) 보러가기



간단남 응원하기

작은 관심과 응원만으로도 지속해 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간단남] 3월 1주 차 아침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