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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r 21. 2022

[주간단남] 3월 3주 차 아침 생각

22.03.13(일) - 22.03.19(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3.13 (일)


(..)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스스로가 평가하는 것보다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도록 설계된 것은 모두 시스템의 의도된 결과다. 타인의 존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이라는 것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것 역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명제에 불과하다. 

사회적 동물 이전에 우리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근원에서 온 존재다. 개별적인 존재인 동시에 하나로 연결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평가나 나 스스로 내린 평가나 사실 다를 바가 없이 중요하다. 오히려 스스로의 평가만으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연결성에 대해 자각한다는 것은, 마음이 닫혀있지 않고 시야가 고정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절로 넓어질 수밖에 없다. 박학다식함은 열린 마음에 뒤따르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반대로 접근한다. 마음은 닫은 채 지식으로 배를 채운다. 그 결과 자신만의 진리라고 믿는 마음이 발달했다. 지식의 무게와 함께 그런 마음은 더더욱 커져만 간다.

연결성에 대해 논하는 사람이 나와 생각이 다른, 내가 본 연결성을 보지 못하는 누군가를 너무나 쉽게 비난한다. 이것은 연결성을 안 사람이 아니다. 연결성을 개념적, 지식으로만 습득한 사람이 그 지식, 그러한 개념적인 관점을 렌즈에 장착하지 못한 사람을 비난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높이기 위한 근거로써 활용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진정으로 연결성을 회복한 사람은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안다. 나 자신이 아는 것만이 진리가 아님을 안다. 그렇기에 분별하지 않고 그 대신 화합과 조화, 통합을 추구한다. 열린 마음이 연결성 회복의 중요한 열쇠다. 닫힌 마음으로 게걸스럽게 흡입하여 소화도 채 되지 않고 장내에서 부패하는 지식은 결코 구원과 해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22.03.14 (월)


(..)

사고력과 논리력은 인간 사회, 적어도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에서는, 최고로 여겨주는 덕목 중 하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유용하게 바라보는 관점을 넘어서 숭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성을 감성보다 우선시하며, 감정을 배제하고 논리만을 앞세우며, 눈앞의 현상보다는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그것을 쪼개고 분석하고 해설하는 과학만을 맹신하게 됐다.

(..)

감성과 논리의 결합, 과학과 비과학의 결합, 경쟁과 조화의 결합, 제약과 무한의 결합이다. 이것은 음과 양, 낮과 밤처럼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 결코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자연의 구조를 좇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좋든 싫든 우리의 역사의 흐름 또한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기반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

제아무리 날고 기는 소수가 다수를 통제하고 은연중에 다수의 각성을 막고 있다고 한들, 그것은 시간문제일 뿐 언제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과도 같은 흐름이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최대한 연장하고 미루기 위해 갖은 수를 쓰고 있을 뿐이다.

(..)

생각의 배수로를 개방했을 때는 그 어떤 것도 고려치 마라. 울려대는 생각까지도 포함시켜버려라. 그 물살에 잠겨버리도록 말이다. 콸콸 쏟아지는 물결 속에서 개운함과 기쁨, 환희와 희열을 매 순간 느껴보아라. 생각의 수문을 개방하는 이 시간을 숭고하고도 기쁜 시간으로 느낄 수 있도록 전심을 다하라.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 이 시간을 깨어있음으로 보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졸음기 가득하던 눈에는 어느새 빛이,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22.03.15 (화)


(..)

우리는 인체라는 아주 정교한 장치에 탑승 중인 영혼들이다. 그런데 그런 숭고한 현실에 비해 정작 우리의 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이런 음식을 먹으면 몸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전자파가 어떻게 우리 몸의 생명력을 교란 시킬 수 있는지, 기침은 왜 일어나는지, 콧물은 왜 나는지, 염증은 무엇인지, 그리고 생각과 감정과 마음은 무엇인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기초 교육에서 배울 수 있는 정보와 지식만으로 세상을 모두 해석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의 현실은 어떠한가. 주입받은 내용을 고스란히 암기하여 프린트기 마냥 그대로 복제해 내는 것으로 등수를 매긴다. 얼마나 교육자의 통제에 순종하고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는 지로 성품을 평가받는다. 현 교육제도의 문제점은 전달하는 정보의 질이나 내용 자체보다도 그것이 각 개인을 어떤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지에 있다. 

획일화 시키고 통제하고 순응하게 하는 것을 유년기, 청소년기에 걸쳐 반복 숙달시키는 현재의 시스템은 똑같은 정보를 제공받아도 활용할 수 있는 저마다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정답'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제한시켜버린다. '학습된 무기력'은 통솔하기에 제격인 '순종적 인간상'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만큼은 가히 으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개개인의 고유한 인간상을 '프랜차이즈화'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인류는 지금 동시에 저마다의 쇼를 찍고 있다. '트루먼 쇼'말이다. 우리 모두가, 당신도, 나도 트루먼들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까?  영화 속 트루먼처럼 용기를 가지고서 진짜 세상 밖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원래의 세상에 안주하며 그래도 여기만 한 곳은 없다며 우리의 무의식에 입력된 '순종 DNA'를 뛰어넘지 못하는 존재로 남게 될 것인가? 나에게는 그런 용기가 있는가?



22.03.16 (수)


(..)

"죽고자 하는 자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 죽을 것이다" 이와 같이 유명한 격언들은 하나같이 역설을 담고 있다. 이러한 역설의 원리는 생활 곳곳에서 적용될 수 있다. 무언가에 집착하는 사람과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사람 중에서,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는 전제하에서라면, 누가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될 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후자인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결과에 대해 더 바라지 않았던 후자가 오히려 바라지 않았던 그것을 손에 넣는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곧 원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매사를 의도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눈앞에 두고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중얼거려봤자 그것에 대한 집착만 도리어 더 높아질 뿐이다. 왜일까? 염불의 내용만 원하지 않는다 일뿐, 그것의 숨은 의도는 그것을 취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대로 하면 저 케이크를 얻을 수 있을 거야!' 하는 의도 말이다. 

역설에 담긴 진짜 의미는 집착하지 않음에 있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현재 상태, 즉 경험의 대상이나 종류에 대해 결정권을 쥐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삶의 시나리오를 스스로가 통제하지 않으려는 텅 빈 마음, 삶이 선사하는 것은 모두 내게 필요한 경험이라 여기며 편식하지 않겠다는 열린 마음, 그저 매 순간 내가 숨 쉬고 있고 발 딛고 있는 현재에 충실하겠다는 마음이 바로 역설에 담긴 숨겨진 원리인 것이다.




22.03.17 (목)


(..)

우리를 좌절케 하는 말이 언제나 마음과 이성의 목소리인 것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영혼이 쓴소리를 한다. 내면의 아이는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다. 이건 좋고, 저건 싫어. 그러나 검열관은 때로는 능구렁이나 뱀과 같이 내가 발전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는 상황을 오히려 격려하며 안일한 생각에 빠질 수 있도록 격려한다. 따뜻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모두가 천사인 것은 아니다.

(..)

내면의 아이와도 같은 창조성(우뇌)을 보살피는 것이 내 평생의 과업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줄곧 검열관(좌뇌)이 지도자로서 군림해 온 시간을 지나왔으니 말이다. 둘 사이에 올바른 균형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한동안은 영혼에게 왕좌를 넘겨줄 필요가 있다. 자신이 군림하는 동안에는 둘 사이의 교류가 이뤄질 수 있도록 놓인 다리를 끊어내버린 검열관과 달리, 영혼은 그것을 다시 재건할 것이다. 그는 분석하기보다  통합하고, 분열시키기 보다 화합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

양 극단을 오고 가는 과정에서 인간은 올바른 균형점을 찾아간다. 한 쪽에 치우져만 있으면 고이고, 고이면  썩는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쩌면 계속해서 양극단을 넘나들며 특정 지점을 향해 수렴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어떤 갈등도, 충돌도, 충격도, 놀라움도 없이 온실을 구축하고 거짓된 평화 속에 사는 것은 현자의 삶이 아니라 병자의 삶에 가깝다. 현자는 모든 경험에 수용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이다. 현자의 길을 걷자.




22.03.18 (금)


(..)

세계의 외형은 민주주의를 띄고 있으나 실상이 과연 그러한지 의문이다. 대의 민주주의라 함은 국민이 국가의 지도자를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위임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세계의 대표'를 표방하는 각종 단체의 출범은 어떠한가. 누가 그들에게 세계를 대표할 자격을 주었나? 세계 시민들의 투표라도 한 적이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범정부적인 기구로 보기보다 그저 민간 기구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에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큰 권한을 지니고 있을 뿐. 세계 시민의 리더를 자처하고자 한다면 그에 응당한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

정신이 없지만 동시에 기쁘다. 배움은 언제나 즐겁다. 그 배움을 쌓아두기만 할 것이 아니라 동시에 펼쳐내고 세상에서 쓰일 수 있도록 드러낼 때 그 시너지는 더욱 증폭될 것이다.




22.03.19 (토)


(..)

무엇이 답인지를 찾아나가는 과정의 목적이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가 되어선 결코 안 된다. 정답을 찾아낸 것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여러 관점에서 현상을 파악해 보려 노력하는 과정에 의해 주어지는 자연스러운 결과이지, 그 자체로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정답은, 진리는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것이다. 정답은 없다. 무언가를 정답이라 확신하는 순간 스스로 만든 사고의 덫에 걸려들고 만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선동되는 이유는 결코 그들의 지성의 문제가 아니다. 삶에 치여 살기 때문이요, 그 속에서 생각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와 의욕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나 사명감을 느끼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 속에 놓인 대소사를 처리하기에 급급하며, 그것이 끝나는 중간중간에 발생하는 여가 시간에는 고갈된 에너지를 재충전하기에 여념이 없다. 사회가 대중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의문 갖는 것을 불필요하고 피곤한 일이라고 치부하는 문화도 한몫한다. 의문은 권위를 가진 자에게는 그것에 대한 도전으로 취급받으며, 동료들 사이에서는 물 흐리는 미꾸라지 취급을 받는다. 학부 수업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업 끝나는 시간에 질문을 한 사람을 대역 죄인 취급을 했던가. 심지어는 네 주제를 알라며 권위에 대한 의문을 갖는 데에 마치 어떤 '전문 자격'이라도 필요한 것이이라는 관념을 주입하기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명한 전기고문 실험, 죄수와 간수 실험, 집단 압력 실험 등은 인간이 권위 앞에서, 완장이나 역할 앞에서, 동료들의 압박 속에서 얼마나 주체성을 상실하기 쉬운 존재인가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런 인간의 심리학적 특징을 자신의 안일하고 나약한 마인드 셋을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그런 심리적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있는 상태로 자신의 의식을 명징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

인간의 본능에 대해, 군중 심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집단 하에서 흔들리기 쉬운 개인의 주체성에 대해 고찰하고 인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정신을 차려 봤을 때 자유의지를(지금도 이미 제대로 갖추고 있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완전히 상실한 '새로운 세계의 질서'에 의해 재편성된 세상의 신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묻자. 무엇이 진실인가? 이것은 결코 일시적 물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계속해서 배우고, 생각하고, 관찰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행동하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바꾸는 큰 물결은 그런 작은 몸짓들이 모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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