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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r 07. 2022

[주간단남] 3월 1주 차 아침 생각

22.02.27(일) - 22.03.05(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3.01 (화)



(..)

4일을 내리 모닝페이지를 못 썼다. 전날 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 탓이다. 내가 늦잠을 자는 경우는 보통 2가지다. 뭔가에 열중하느라고, 혹은 뭔가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경우다. 대부분이 후자일 때가 많다.


(..)

지난 며칠은 거대한 무언가를 앞에 두고 무력감이 들었다. 동시에 지금 내가 추구하던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혼란스러웠다. 언제나 내가 입버릇처럼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듯, 시스템이 원래 그렇다며 말해왔지만, 이건 그것을 넘어서는 차원의 얘기였다.


그것보다 더 깊고도 악랄한 검은 실체의 존재에 대해 더욱 가시적인 정보들을 접한 결과, 내가 보고 있던 세계마저, 박스 바깥을 보고 있다 생각했던 것들마저 '그들'의 그림자 놀이에 불과했음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여전히 '플라톤의 동굴' 안에 머물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동굴은 훨씬 크고 깊었다. 나는 결국 체제 아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이 제시한 범위 안에서만 제한된, 허용된 '일탈'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

자발적이고 주체적이라 여겨왔고 믿어왔던, 아니 너무나도 당연했기에 믿는 것조차 필요가 없었던, 용기를 낸 결정들 속에 '진짜 나'는 존재했나? 그것이 100% 내 안에서 일어난, 직관의 깨끗하고 투명한 안내에 따른 결정이라고 어떻게 확실할 수 있지?


(..)

신을 흉내내고픈 그들은 모습은 드러내지 않은 채 세상의 모든 것을, 인류의 생과 사를, 일상의 모든 사고와 의사결정에 이르는 전 범위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한다.

역사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권력자들은 신에 가까운 전능적인 존재가 되기를 원했고, 대중들은언제나 예외없이 그들에게 속아왔다. 역사책을 통해서 시민과 대중이 승리한 사례도 접해왔지만, 그 역사책이 '누구'에 의해 쓰여졌는지는 모른채 누군가 큐레이팅한 일부만을 두고 역사 전체를 배웠다고 착각에 빠진 것이다.


(..)

정보통신과 과학기술이 날로 발전함에 따라 우리의 삶만 편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대중들을 휘어잡고 선동하여 분열시키고, 이를 통해 그들을 통제하는 방식은 더욱 은밀해지고 교묘해졌다. 때로는 너무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기까지 한 그들의 방식은 평범한 대중들의 인지체계에 결코 쉽사리 포착되지 않는다.


(..)

이럴 때 나는 보통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것들에 관해 깊게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내 삶의 균형이, 마음의 조화와 중심을 일허버리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22.03.02 (수)



(..)

영화 <다빈치 코드>는 흥미로웠다. 그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지 그것이 미스테리한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수비학이나 애너그램 등의 암호학, 기호학부터 시작해서 각종 상징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평범해 보이는 우리의 일상 속에 교묘히 숨어든 은밀한 종교 전쟁이라는 컨셉은 마치 우리가 발딛고 사는 현실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착각이란 단어를 쓴 건 의도적이다. 그것이 착각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일뿐, 현실은 그보단 훨씬 순수하고 단순하길 바란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영화 그 이상이다.


(..)

우리의 삶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실체를 알 수 없는 배후 세력들에 의해 작동되는 신기루, 허상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소위 말하는 '음모론'적인 관점을 차치하고 조금 더 과학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해보자. 인간의 육체가 오감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대상에는 한계가 있다.


가령, 먼지만 해도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다가 오후에 햇살이 비추면 거기에서 둥둥 떠다니는 먼지를 보고 기겁을 하게 된다. 현미경은 또 어떻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자세히 보게 되면 평소엔 보이지 않던 정말 다양한 것들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오감이라는 '프리즘'이 허용하는 세상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우리의 육체와 오감이 지각이라는 능력을 줌과 동시에 지각의 대상에 한계를 지었듯이, 언론과 미디어 그리고 일반적인 차원의 교육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운 것만이 진실이요, 세상의 전부라고 믿도록 설계된 이 세상은 평범한 대중으로 하여금 그 너머의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

그래서 '무엇이 진짜인가? What is Real?' 라는 물음에 우리는 함부로 답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예로 들어서 우리는 무엇이 근본적 실체인지 정의함에 있어서 그것의 겉모습(프론트엔드)과 속모습(백엔드) 혹은 그것들을 나타내는 언어인 소스코드 중 어느 것 딱 하나를 골라서 그것이 근본적 실체라고 정의내릴 수 없다. 모두가 해당한다고 할 수도, 어느 것도 진짜가 아닌 '일면'에 불과하다고 답할 수도 있다.


(..)

실체가 무엇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전부라고 믿는 모든 것의 경계 너머에는 언제나, 반드시, 예외없이 무언가가 더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22.03.03 (목)


(..)

생각은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그것은 몇 년을 지속해 온 한 습관에 대해서도 잠시 멈춰서서 의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한 순간에 그 습관의 근본 동기를 뒤흔들 수 있다. 반대로 아무 것도 아니었던 행동이 평생을 가지고 갈 숭고한 업적으로 느껴지게끔 만들 수도 있다.


(..)

자연에 존재하던 것이든,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든 그 자체로 선하고 악하거나 옳고 그른 것은 없다. 그것을 사용하는 개인의 동기가 그것의 선악과 시비를 결정짓는 것이다. 돈이든, 기술이든, 권력이든. 우리가 흔히 '가치'를 평가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늘 가치 중립적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주체가 아닌 객체이다. 때로는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 주체의 자리에서 객체로 내려옴을 자처한 것도 역시 주체였던 그 개인이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가 뒤바뀐 상황 역시도 주체에 의한 결정일 뿐, 객체는 죄가 없다.


(..)

내 삶을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꾸리기로 결심함으로써 더 만족스러운 삶을 꾸려가겠노라고, 이렇게도 충분히 잘 산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런 마음 가짐이 이따금씩 찾아오는 '밤의 손님'을 불러들인 게 아닐까. 시선이 내면이 아닌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에 머물러 있는 한 진정한 자유는 결코 얻을 수 없다. 타인의 시선이란 결국 사회의 시선이요, 그러한 시선의 흐름은 모두 막후의 세력에 의해 조작되고 만들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누군가에게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마음 가짐은 변화를 촉구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주변과의 마찰에 대한 두려움, 별난 존재로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의한 것은 아닐까? 더 효과적인 수단을 강구한 결과가 아니라,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은 아니냔 말이다.


(..)

시선이 밖에만 머물러 있다면 어떻게든 내가 나의 길을 충실히 잘 걷고 있으며 이게 얼마나 멋지고 즐거운 일인지를 '남들'에게 계속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앞선다. 그 결과 자신의 신념대로 충실히 살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기 자신과의 완전한 합일의 경험을 매순간 놓치게 된다.


타인의 존재를 상정한 '전시의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삶을 살아가며 그때 그때 바뀌어가는 키워드, 관심사의 종류만 바뀔 뿐, 근본적인 삶의 양상은 단 하나도 바뀌는 것이 없다. 변화에 있어 최우선, 최전선에 두어야 할 것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다. 그것이 진정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 나아가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한 가장 묵직하고도 중요한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22.03.05 (토)


(..)

모닝페이지를 적는 이 시간은 써내려 감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내 생각을 비춰주는 샘물 위에 고개를 비추는 행위에 가깝다. 샘물 속 물결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파문이 일어 자신이 비춘 그 얼굴의 형태를 맑게 되비춰 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

무언가를 행하고 결정함에 있어서 1순위가 자신의 이미지를 지켜내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런 이미지는 자신이 만들어 냈거나 외부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을 내면화한 것에 불과하다.


(..)

디지털화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아날로그를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그중 하나가 자유라는 가치이다. 디지털 세상에서 얻는 편리함은 단 한 번도 공짜였던 적이 없었다. 공짜인 척을 할뿐. 편의의 대가로 우리는 앞으로는 자유를 헌납해야 할 것이다. 일기 하나를 써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가 가능한 대상이 될 것이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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