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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Apr 12. 2022

[주간단남] 4월 1주 차 아침 생각

22.04.03(일) - 22.04.09(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4.03 (일)


(..)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직업을 가진다는 것. 다른 말로 창직이라는 보장되지 않은, 외로운 그 길을 가는 기분은 어떨까? 나는 지금 내 안의 관념을 알아차렸다. 창직을 무언가 대단하고, 어렵고, 외로운 그런 거친 비포장도로와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기존 상식'에 얽매여 있었다. 정작 당사자는 매 순간이 가슴 벅참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인데 말이다.

(..)

하나의 제안을 두고 yes나no를 묻는 방법이 아니라, yes를 아예 전제해 놓고서 선택지를 제시하는 트릭이 있다. 가령, 배우 박예진이 그의 남편 배우 박희순에게 커피, 술, 담배 셋 중에 뭘 끊을래? 라고 묻자 박희순은 커피를 끊기로 했다고 한다. 그냥 커피 끊을래? 라고 물었다면 No 라고 대답이 더 수월(?)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네 삶도 이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사회는 개인에게 선택지를 제공한다. 그 선택지의 개수나 범위는 각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배경 등의 환경에 따라 상이하다. 그러나 적어도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개인이 무엇을 골라야 할 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법적 강제도 가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은 자신이 자유로운 시민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그러한가? 선택지를 제시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고르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자체부터가 애초에 자유가 전제되지 않는 형국인 것이다.





22.04.04 (월)


(..)

생각의 얼개를 펼쳐나감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모든 것을 그저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편안한 마음 가짐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글씨체도 제법 중요하다. 서예를 하듯 온 정성을 다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휘갈겨 쓰는 정도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럴경우 내면을 찬찬히 살피는 데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중용의 미덕이 요구되는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마다 깨어있는 의식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매 순간 계속될 수 있다면 어느새 마음은 저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

초심을 잃기는 정말 쉽다. 인간의 본성은 계속해서 살피지 않으면 쉬이 휘둘리는 바람 앞의 버들잎처럼 나부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정작 그 분들이 당신들의 책에 적었던 가르침을 온 몸으로 솔선수범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적어도 자신이 현재 고민하고 체득한 끝에 얻어진 그 '무엇', 바로 그것에 대해 당연히 확신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전하는 말에 확신하지 못하는 교육자만큼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확신은 타인, 혹은 타인이 고민하고 노력해서 얻어냈을 그만의 '무엇'을 까내리면서 얻어진 것이 된다면 곤란하다. 학은 결코 옆에 있는 다른 새들을 찍어눌러서 군계일학의 정점에 서지 않는다. 그 자체로 고고하다면 저절로 기품이 드러날 것이며, 기품이 있다면 저절로 타인의 덕망을 얻게된다. 

(..)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부족함이라는 일면만을 보고 배움의 여부를 결정하는것 역시도 편협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요, 모순을 범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분별심을 거두고 이러함과 저러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무언가에 대해 환상을 갖는 것, 높은 기대치를 모든 영역에 걸쳐 기대하는 것 역시 분별심의 또 다른 얼굴에 불과하다.





22.04.05 (화)


(..)

무엇인가를 할 때 늘 '왜?'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습관을 지녀야겠다. 밥을 왜 먹지? 잠은 왜 자지? 이런 자질구레하고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것에서부터 인간은 개인차를 보이기 마련이다. '왜'가 빠진다면 어떤 것을 하든지 언젠가는 반드시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이 없다면 초심을 잃기 쉽기 때문이다.

(..)

물론 한 번 결정한 초심은 절대로 바뀌어선 안 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의 동기와 목적을 늘 염두에 둔 삶을 사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왜 하는 지에 대한 자각도 없이 그냥 하고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같다. 

(..)

이유라고 해서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사실 '그냥'도 때로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사람의 행동 동기가 언제나 언어로 형상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이 '그냥' 이 이유인 경우에도 그 단어에 내포된 의미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김연아가 선수시절 연습할 때 무슨 생각을 하냐는 인터뷰 질문에 '그냥 하는 거지 뭐.' 라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맥락에서의 '그냥'과 아무 목적도 이유도 없이 말하는 '그냥'은 하늘과 땅끝 차이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당사자가 아니기에 한낱 추측일 뿐이지만, 그 목표나 마음가짐이랄 게 너무나 당연해서 내면화가 되어버린 탓에 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오히려 이유가 분명하면 할수록 생각은 비워진다. 초심을 이따금씩 리마인드 해줘야 하는 이유가 애초에 초심에서 자꾸 멀어지기 쉬운 인간 심리를 전제한 말이기 때문에 그런 전제부터가 애초에 무너진 사람, 즉 나아갈 방향이 너무나 뚜렷하여 뚝심있게 전진만을 반복하는 사람에게는 초심을 되뇌일 필요가 없다. 그게 너무나 당연한지라 오히려 거창하게 답하는 것이 낯간지러운 꼴이 될 뿐이다. 




22.04.06 (수)


(..)

이것을 무조건적인 악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에 의존해서도 안 된다. 언제나 중용. 가장 쉽고 그럴듯한 말이라 어디에나 적용이 가능한 소리이지만 말로 하깃 쉬운 만큼 실제 실천은 결코 쉽지 않다. 개인에게 딱 맞는 지점은 누가 정해줄 수도 없거니와 그 지점마저도 고정되지 않고 매번 변하기 때문이다.

(..)

사람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즐긴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드러내고 뽐내고 싶은 성향이 존재한다. 그런 특성이 곧 창조성으로 승화될 수 있다. 창조의 행위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다양한 수단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표현의 욕구를 창조적 맥락이 아닌 일상적 맥락, 특히 타인과의 교류에 있어서 지나치게 활용하게 될 경우 그것은 자신의 귀를 열기 보다는 입을 열기에 급급한 사람이 되게 만든다. 같은 욕구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삶의 양상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

내면의 창조성과 하나가 된 상태. 아주 찰나에 불과할 지라도 매일을 이러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모닝페이지를 매일 쓰는 이유다. 이것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우리의 영혼은 에너지를 얻는다. 매일 정성스레 나의 영혼을 양육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습관으로 삼을 때 우리는 모닝페이지라는 노트의 종이 위를 넘어서서 일상에서도 그런 창조성과 하나가 되는 경험들을 해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22.04.09 (토)


(..)

그토록 단순하고 사소한 일에도 사람은 반응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존재임을 또 한 번 느꼈다. 깨어있지 않으면 눈 뜨고도 코 베이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의 맥락안에서만 살펴도 충분하다. 과거를, 그러니 그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기반으로 생각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자리는 상대의 과거 패턴을 분석하는 자리가 아니다.

(..)

갈등이 상황에 처한 두 사람 중 한 쪽은 현재에, 한 쪽은 과거에 발을 딛고 있다면 제대로된 대화가 이어질 수가 없다. 

(..)

그것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는 지난 과거, 다 떠나서 오늘의 일들인 짧은 과거에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

과거에 얽매인다면 누구나 자신만의 약점과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답은 현재에 온전히 충실하는 것. 이것을 놓치는 순간 그 누구도 인간사의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벌어진 현상을, 사실을 해석하고 판단하려고 들면 필연적으로 과거가 개입된다. 해석에는 기준이 필요하고, 기준이란 자신의 지난 과거 혹은 인류의 집단 경험이 축적되어 탄생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거에 대한 분석 결과가 아무리 높은 수준의 정확도를 자랑해도 결코, 결코, 결코 100%가 될 수는 없다. 논리와 분석, 이성과 합리는 유사 이래로 단 한 번도 '완전'에 도달한 적이 없으나 언제나 그런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100에 도달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자신이 아는 바가 언제고 틀릴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지니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위대한 현자라 할지라도 그 칭호를 박탈해야 마땅하다.

(..)

인간은 날마다 갈등의 불구덩이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으며, 차디찬 냉전의 얼음물 위의 얇게 얼어있는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평화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거짓 평화는 박살난다. 진정한 평화는 그런 임시방편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 어떤 형태든 간에 손에서 과거를 붙들고 놓지 않는다면 모든 평화는 그저 미봉책에 불과하며 언제나 갈등이 바로 발밑에 존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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