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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Apr 18. 2022

[주간단남] 4월 2주 차 아침 생각

22.04.10(일) - 22.04.16(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4.10 (일)


(..)

인간이 커뮤니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리석음의 프레임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혼자서는 흔들리기 쉬운 길을 다 같이 걸어나간다는 강력한 연대감을 형성하여 혼자였다면 못다 했을 일을 해내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얻는 수단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 있어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믿음이다. 구성원에 대한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이는 커뮤니티가 개인에게 주는 신뢰감과 쌍을 이뤄 시너지를 낸다. 각 개인의 자기신뢰가 모여서 집단의 강력한 에너지원이 되어주며, 그것은 다시 각 개인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을 더 증폭시키고 지속시켜주는 힘이 되어준다.

(..)

여러 방면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다 보니 그들이 겪는 심리적 고충, 고민, 무기력함과 좌절감 등을 전부는 못 헤아리겠지만 짐작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어가는 것 같다. 내가 이토록 비주류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그런 삶의 양상을 띄는 것은 그만한 사유가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소명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힘없는 자들이 주눅 들지 않도록, 자기 자신의 삶을, 나아가 세상을 사랑하도록 동기부여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22.04.11 (월)


(..)

누가 그랬더라. 돈, 명예 다 잃어도 자신감을 잃는 것에 비할 수 없다고 말이다.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스스로에 대한 믿음.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큰 무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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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넘어 그저 '아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당연하게 이뤄질지도 모른다. 이런 당연함에 가까운 자기신뢰의 기반은 경험에 있다. 내가 물을 마시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물을 마시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생기면 어쩌나, 내가 물을 마실 능력이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물을 마시기 위한 자기 확신을 위해 노트에다가 '나는 내일 아침 물을 한 컵 마시게 된다.'라는 문장을 100번씩 적는 사람도 없다. 그저 그렇게 하리라는 의도를 품을 뿐이다. 그것이 인간 생각의 힘이 지닌 본연의 모습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그토록 단순하고 간단하게 모든 것이 척척 이뤄지지는 않는다. 우리를 가로막는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교육부터 시작해서 미디어나 대중, 우리 주변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말하는 여러 관념들을 이른 나이에서부터 수용하다 보면 가능성으로 가득 찼던 무의식에 분별심이 자리한다. 나의 취향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이들의 취향이 존재하고, 자신만의 판단 기준 대신 남들이, 다수가 옳다고 따르는 기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사회에 보다 다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그리하여 세상을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눠 보는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사고에서 사람들이 탈피하기를 바란다. 이런 사고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단순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단 두 가지로 나뉜다. '존나 좋아.' 또는 '존나 싫어.' '존나 멋져.' 혹은 '존나 구려.' , '존나 맛있어.' , '존나 맛없어.' 중간 같은 건 없다. 자신만의 표현으로 생각을 드러내면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우리 편이란 거야 적군이라는 거야, 입장을 확실히 해.'라는 핀잔만 듣게 될 뿐이다.

(..)

몸의 움직임이 동반된 행위라면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정수인 듯하다. 일관성은 자기 몸에 대한 이해와 자기 마음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생각이 사방으로 튀지 않게 잘 정돈하는 것, 그리고 어떨 때, 어떤 동작이, 어느 정도로 나오는지, 자신의 몸에 대한 이해를 머리와 몸 모두로 이해하고 체득할 때, 그제서야 우리는 하나의 동작을 완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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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잠재력이 한 데 모여 움트기 위한 태동을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벌써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가 없다는 말은 가능과 불가능에 대한 얘기라기보다는 사람이 모였을 때 발생하는 시너지의 힘을 강조한 표현이 아닐까?




22.04.13 (수)


(..)

해야 할 건 많고 시간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일단 내가 시간을 소중히 사용하고 있는지, 온전히 현재에 머물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지금 하는 것을 왜 하고 있는지를 매 순간 잊지 않고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느낌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현재에 머무는 것이다. 현재에 머무는 자에게 시간은 단지 숫자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느긋함이나 초조함으로 반응하며 휘둘리지 않는다. 그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그 순간을 온전히 살아낸다.

(..)

인간은 소속됨으로써 안정감을 느낀다. 어딘가에 소속됨 없음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한다거나, 동거인이나 반려인 혹은 반려동물이 있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특정 분야에 대한 배움이나 취미 등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기 자신과 친한 친구가 됐다거나. 바꿔 말하면, 소속감이란 곧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인간은 무언가와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

관계라는 것은 상호성을 전제한다. 일방적인 관계라고 할지라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존재한다.

(..)

각자에겐 어떻게든 관계를 맺는 짝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장하면, 각각의 존재들이 또 다른 대상들과 관계를 맺어나갈 것이라고 자연스레 추측이 가능하다. 겸업 불가, 외도 금지 등은 인간이 명문화한 제도일 뿐, 자연 상태의 인간은 역시 자연계의 일부로서 상호성이 전제된 관계 맺기를 끊임없이 해나가게끔 되어있는 존재이다. 여러 관계들이 확장되어 촘촘한 거미줄처럼 커다란 관계망을 형성해 갈수록 인간은, 아니 우주의 만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명쾌한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

인도의 나마스테라는 인사말은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인사를 건넨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게 인사를 건네는 순간 둘은 관계를 맺는다. 관계를 맺은 둘은 하나가 된다. 서로의 안에 있는 내면의 신은 결국 근원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들을 아우르는 전체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

만물은 계속해서, 매분 매초 변화를 지속한다. 무한한 변화의 파동 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정되어 보이는 듯한 물질계가 탄생했다. 그렇다고 내 눈이 물질 너머의 파동의 실체를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달리 보인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오감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본 결과일 뿐, 결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제아무리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해도 모두가 결국 하나의 필터가 씌워진 것, 프레임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논지의 연장선에서 보면 결국 가장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 프레임은 없다. 가장 근본에 해당하는 만물 자체가 끝없이 변하는 존재인데 어찌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지나지 않는 한 프레임이 영고 불변의 지위를 얻는단 말인가. 어떤 것이든 과도한 집착, 과도한 확신, 과도한 추종을 삼가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유용한 도구인 프레임이 우리를 집어삼키고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기억하라. 세상 그 어떤 프레임도 결국엔 나를 위해, 크게는 인류를, 세상의 이로움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것이 과학이든, 돈이든, 종교든, 정치든 간에 말이다. 




22.04.14 (목)


(..)

전혀 다른 종교들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어떻게 다 비슷할까? 이럴 때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어떤 집단 무의식 같은 존재, 인류의 영감의 공통 원천 같은 것이 분명히 존재함을 느낀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보다도 훨씬 이전에, 통신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부터 보이는 여러 우연의 일치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

여기저기서 여러 가지 정보가 동시에 내게 들어오고 있다. 무엇이 내게 맞을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러 정보를 두루 접하는 것이 어느 하나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아닌 것을 가려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 데이터들을 두루 살피며 교차 검증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장점을 십분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무엇이 답인지에 대한 확신은 어려워도 무엇이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소거법으로써 천천히 올바른 방향을 찾아나가면 되는 것이다. 

(..)

어떤 길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길인지만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효율성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각광받는 것이 현대 사회다. 효율적인 길만 찾으려는 사고방식이 만연한 것은 성공만을 찬미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실패로 보는, 득과 실의 관점에서만 모든 것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낳은 폐해다. 

성공하지 못한 것, 즉 소위 실패라 불리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그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길, 옳다고 믿는 길이 아니라, 효율적이고 안전한, 성공이 담보된 길만을 좇게 된 것이다. 이진법으로 사고하는 컴퓨터도 아닌 주제에 대체 왜 우리 인간은 세상을 둘로 나눠서만 보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은 분별적인 사고방식, 이 낡고 고루한 패턴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그것이 된다면 인류의 큰 업적으로 남을 만큼 커다란 진보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미워하고 반목하고, 떡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고 다투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동물의 레벨에서 더 진화하지 못했음을, 인간의 탈을 껍데기로만 쓰고 있는 짐승과 다를 바 없음을,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못한 존재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매일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매 순간을 자각하며 살아갈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22.04.15 (금)


(..)

10년 후 우린 무얼 하고 있을까. 그때 그 시절 서로 이런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재수생이기 이전에 꿈 많을 나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수험생 생활 탈출이라는, 좋은 대학 가기라는 하나의 '집단적 목표'에만 골몰해 있었다. 친구들은 어땠을까. 어떤 꿈을 지니고 있었고, 지금은 그 꿈대로 살고 있을까?

(..)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설파해야만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간접적인 방식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그런 방식은 심지어 특별히 의도하지 않아도 발휘될 때가 많다. 자신만의 신념이, 색채가 뚜렷한 사람은 그가 의도하지 않아도 타인에게 영감을, 생각할 거리를 준다. 

(..)

집도, 차도, 심지어 지금은 별다른 벌이도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내 삶은 이때껏 살아온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 내겐 자유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무엇보다 내가 추구하는 비전이 있다. 그것들이 모여 만든 하나의 파동 에너지는 마치 파도처럼 솟구쳐 나를 앞으로 이끌어준다. 나는 (실제로 서핑은 못하지만) 한 명의 서퍼처럼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이것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설레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즐기고 있다. 그것은 생의 느낌! 파도가 치며 튀기는 물방울들이 내 얼굴에 닿고, 파도가 굽이치고 부딪히고 또다시 굽이치기를 반복하며 만들어내는 부드럽고도 강력한 파열음은 내 모든 감각을 일깨운다. 

(..)

자연의 소리에는 고유의 파동과 주파수가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에너지를 주며 아무리 들어도 피로감을 유발하지 않는다. 자연은 닮은 삶, 내면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는 주체적인 삶 역시 인간에게 있어 가장 자연스러운 삶을 선사한다. 문명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난 이단아의 삶에 가깝다. 그러나 문명을 닮은 삶보다 자연을 닮은 삶일 때 인간은 가장 인간 다울 수 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때 각자에게선 빛이 난다. 각자의 영혼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빛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날수록 회색빛의 삭막한 도시는 다채로운 빛으로 빛나는 찬란한 동산으로 거듭날 것이다.

(..)

자연스럽게, 자연답게 살아갈 때 인간은 끝없는 에너지와 영감을 받게 될 것이며, 눈에서는 생기가 감돌 것이다. 자신이 현재 처한 육체적 나이에 무관하게 눈에서 빛이 나는 사람에게서는 특유의 에너지가 감지된다. 바로 그것이 모두가 추구해야 할 인간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추구하지만 그 결과는 100인 100색이다. 

획일화와 집단주의는 이런 잠재력을 지닌 역동적인 인간을 망치는 주범이다. 그것에서 탈피하라. 자신을 가두고 있는 껍데기를 깨고 나와 진짜 세상으로 비상하는 날갯짓을 시작하라. 두려움도 막막함도 생기겠지만 그것 역시 삶의 일부다. 그것 역시 비상하는 삶이 선사하는 즐거움 중 하나다. 삶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만을 가져다준다. 삶을 통제하려 들지도, 그렇다고 그것에 끌려다니지도 말라. 삶이라는 파도의 흐름 위에 올라타는 서퍼가 되어라.



22.04.16 (토)


(..)

어딘가 익숙한 날짜다 했더니 오늘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날이구나.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아마 평생 동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엄숙한 분위기로 수습된 시신을 나르던 그 순간들을, 팽목항에서 울려 퍼지는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어찌 잊을 수 있겠냔 말이다.


(..)

이런 비극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 비통한 슬픔에 잠기는 남겨진 사람들, 이러한 재앙의 반복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로 이득을 보는 미친 집단들이 만에 하나 존재한다면, 그들이 결코 행복한 여생을, 행복한 내생을 살 수 없길 바란다.


(..)

내가 역학을 배우는 이유는, 비단 역학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다. 바로 가족과 이웃, 사랑하는 이들과 이 사회, 국가, 세상을 그런 탐욕과 부패로 가득 찬 세력의 농간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

무조건 질문부터 하고 보는 성급한 태도도 습관이다. 그것은 스스로 사고해 보고 배움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차분하게 기다려보자. 마음속에 질문을 품고 있다면, 그것에 대한 답이 절로 나를 찾아올 터이니. 내가 해야 할 것은 단 하나. 그것을 진정으로, 진심을 다해 궁금해하고 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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