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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Apr 04. 2022

[주간단남] 3월 5주 차 아침 생각

22.03.27(일) - 22.04.02(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3.27 (일)


(..)

역사의 수많은 사건들 중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 가려진 작품인가? 어디까지가 자연법칙에 의해 발생했고, 어디까지가 그들의 시나리오에 의한 것인가?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구별할 재간이 없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또한 과정이겠거니라는 생각이 든다. 코끼리의 발부터 만져봐야 설령 그것을 처음엔 그저 튼튼한 기둥인 줄로만 알다가도, 종국엔 그것이 코끼리란 사실을 알아챌 넓은 시각과 깨어있는 의식을 갖게 될 첫걸음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멈춰 서지 않음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세계에서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휘해야만 한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전말이 세상에 드러나기까지의 과정은 여러 명이 바통을 이어 받는 계주와도 같았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목숨까지 걸어가며 정의의 횃불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나르던 고마운 분들이 곳곳에 존재했었다. 누군가 하겠지... 하며 주체성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역시 변증법에 버금갈 정도로 인류 역사의 큰 기틀을 이루는 법칙이다. 여기에 대고 누군가는 '실수로부터 배우는 법이다.'라며 그럴듯한 해석을 하곤 하겠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말은 경험주의의 타당함에 대한 근거가 되어선 안 된다. 오히려 징후가 충분히 보였음에도 눈 가리고 아웅하다가 소를 잃는 상황에 직면하게 됨을 꼬집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것은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각자가 그 자리에서 했어야 할 의무를 충실히 하지 않을 때, 진실의 횃불을 올리는 대신 굴종의 그늘 뒤로 숨는 행위들이 쌓여갈 때 그것이 임계점을 넘게 되면 하나의 사건으로서 얼굴을 드러낸다.


(..)

그들 역시 자신들의 자리에서 전통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진실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나는 늘 그러한 성격의 존재들에 강함 끌림을 느낀다. 그리고 마치 홍수처럼 범람하는 최신 유행과 트렌드, 대중들의 큰 물결에는 경계심을 느낀다. 이 큰 물결의 뒤에서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22.03.28 (월)


(..)

일부일처제는 사실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에 불과하다. 실제로 연애든, 파트너 관계든 단 한명과만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제도적/문화적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 역시 머리로는 그들의 논리에 동의를 하지만, 아직 가슴으로까지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

인간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제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정확히는 그 제도가 허락하는 선에서 각자의 욕구를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버젓이 애인이 있음에도 야동을 보고 자위를 하는 남녀, 설레던 연애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거나 대리만족을 위해서 드라마에 계속해서 빠져드는 사람들, 못다 이룬(?) 이상형에 대한 선망을 미디어 속 연예인이나 아이돌 등을 통해 해소하는 사람들 등등. 그런 장치들도 없이 일부일처제를 실시하고 한 번 짝이 된 상태에서는 딴 눈 파는 것은 1분 1초도 허용하지 않은 세상이었다면 인류는 아마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

이러한 현실을 고려했을 때, 바람/외도 등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타당한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이기 전에 동물이다. 동물적 욕구가 없다고 말하는 동물은 이미 동물이 아니다. 자신이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 꿈이든, 미디어든, 상상이든, 어떻게든 그 욕구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해소가 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것을 타인을 비방하고 자신을 드높일 우월성의 카드로 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동물적 본능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우선시함으로써 누군가가 받게 될 '인간'으로서의 감정적 상처를 주는 것을 옳지 못하다 여길 줄 아는 마음이다.





22.03.29 (화)


(..)

돈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를 잃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돈을 수단으로 무언가를 내게 더하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돈과 관련된 부정적인 관념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알아차리되, 억압하지 말고 존재 자체를 허용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자리를 새롭게 꿰찰(?) 새로운 방향의 관념을 주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식적인 행위로 무의식적까지 가닿기는 비록 쉽지만은 않을 것이나, 꾸준하게만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무의식에 가서 안착하게 될 것이다.




22.03.31 (목)


(..)

무언가 하기 싫고 귀찮은 마음이 들 때 그것을 억압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내면에서 올라오는 찝찝함을 느껴보는 것. 그것이 무기력, 귀찮음 뒤에 가려져 있었던, 진짜 억압된 감정의 숨은 정체라는 것이다. 내 경우는 역시나 생산성에 대한 강박이 자리 잡고 있다.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 해, 열심히 살아야만 해, 근면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해. 이와 같은 마음속, 머릿속의 강박적인 관념들은 그렇지 않은 존재는 쓸모가 없다는 관념과 궤를 나란히 한다.


(..)

시간의 소중함을 운운하는 사람치고, 아니 조금 더 정확히는 시간에 쫓겨서 늘 바쁘다고 습관처럼 말하고 다니는 사람 치고 시간을 제대로 운용하는 사람은 없다. 다이어트해야 한다면서 배달음식 앱을 보거나 먹방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면서 정작 일상 속에서 시간을 금같이 여기지 않고 흘려보내는 시간이 많은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래 너 말이야). 이런 반성의 기저에는 시간은 결코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 있다.


(..)

똑같은 격언도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말 역시도 '지금'의 소중함에 대해 역설하는 말이 될 수도 있고, '효율성'을 추구하는 삶을 지향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요즘 사회에서는 후자로 해석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내 무의식에도 시간에 관해서는 그러한 관념이 작용하는 것이다. 늦잠을 잔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그것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딘가 지쳐있다는 신호다. 그런 지쳐있음에 대해 무의식적인 관념들은 곧장 '타당성'을 가려내고자 한다. 늦잠을 잔 순간 여기저기서 어김없이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채찍'들이 나를 휘갈겨 쳐댐을 느낀다.


(..)

생각, 관념이라는 것은 물리적 실체가 없는 만큼 다른 이의 무의식에 침투하기에도 용이하다. 마스크를 쓴다고 해도 바이러스를 결코 막을 순 없지만, 우리 몸에는 마스크를 뚫고 들어온 외부 물질과 싸울 면역 체계가 있듯이, 관념의 무분별한 주입을 방지하고자 우리의 정신적인 레벨에서도 방어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 마음이다.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보고 비교 분석하며, 받아들일만한 내용인지, 도덕적으로 타당한지, 나의 삶에 도움이 될지 등을 다각도에서 바라보고 결정을 내린다. 소위 말하는 비판적 사고가 그것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퍼지고 있는 각종 선언과 이데올로기, 통념과 주류적 관념 등을 고스란히 수용하기 시작하다 보면 마음속 '파수꾼'은 어느새 '나팔수'로 전락하고 만다. 파수꾼을 나팔수로 만드는 과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진행된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답을 외워 시험을 치르게 하고, 어른들의 말씀에는 묻고 따지지도 않고 복종하게 하며,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등의 튀는 행동을 터부시한다. 그 결과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함에 있어 자신의 기준보다 먼저 그것을 경험한 자들의 기준을 더 우선시하고, 남 앞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렇게 개성과 주체성을 상실한, 순한 양과 같은 대중(Sheeple)이 되어가는 것이다.


(..)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그런 구속에서 자유로워짖겠다고 결심한 순간, 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물은 끝없이 변한다. 설령 지금 이 순간 자유로움을 선언해도 곧바로 내일의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면 또다시 구속된 기분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새롭게 선언해라. 이런 일련의 반복적인 과정이 필요하기에 이것은 어려운 길이라는 인식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식의 초점을 남아있는 과정이 아니라 매 순간, 선언하는 그때로 맞춘다면, 나는 언제고 자유로운 존재로 계속해서 남게 될 수 있는 것이다.


(..)

그것은 어느새 내 무의식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믿는 자동적인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마음속 파수꾼이 나팔수가 되지 않도록 늘 깨어있자. 무의식이 다른 이들에 의해 지배되도록 내버려 두지 말자. 쫓기듯 살지 말고 사랑으로 살자.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22.04.01 (금)


(..)

삶이 나를 필요한 곳으로 이끄는 것에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따금씩 찾아오는 귀차니즘, 의욕 없음 등을 불청객처럼 대하는 습관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런 것들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삶은 반드시 내게 필요한 것들만을 경험하게 한다. 왜 이런 경험들이 내 삶에 펼쳐지는지를 깨닫는 것은 나만의 과제다. 삶이 던지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된다.


(..)

호기심과 탐구심, 순수한 열정 등에서 비롯된 에너지 그 자체는 우리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원천과 가장 닮아있는 형태의 그 무엇이다.


(..)

삶이 나를 이끄는 방식은 나의 상식과 관념이라는 좁은 틀로만 바라봐서는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다. 오히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불친절함에 가까울 때가 더 많다. 뭔가 기분 나쁜 사건이 생긴다거나, 큰 상실을 경험한다거나, 또는 단순히 자신이 정해놓은 삶의 시나리오(매일매일의 루틴을 비롯한 각종 계획과 인생의 청사진)에서 벗어나는 일들을 일으키기도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순간은 매일, 매 순간 일어난다. 매일의 하루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볼 때 삶은 그저 그런 무미건조한 나날들의 연속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의 탐구 대상이 될 수 있다.


(..)

어쩌면 그때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분별심으로 세상을 또 해석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 큰 어른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것을 유치하다 여겼고 상호 존중과 점잖은 태도를 갖추지 않았다면 거들떠볼 필요도 없다고 여긴 것이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의도에 있다. 그들에게는 남들에게 착해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그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것은 선한 의도요, 공공의 선을 위한 공리주의적 관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결과로 인해 형성된 결과적인 여론의 양상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전달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들의 불쾌함을 유발하는 전달 방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것에 담긴 의도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반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꼼꼼히 분석하는 태도가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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