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투를 통해 본 전략적 교훈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한반도에서 제일 최근에 발생했던 전쟁인 6·25 전쟁에 관한 책에 대해서 읽게 되었다. 6·25 전쟁에 관한 책을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제일 최근에 전쟁인 만큼 관련 서적이 엄청 많았다. 나는 그중에서도 김철수 예비역 장군이 지은 ‘그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를 선택하여 읽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지은이가 육사 출신의 예비역 장군이라는 점이 가장 컸다. 평생을 군인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다하신 분이 바라보고, 연구해 온 6·25 전쟁이 궁금했던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집필자인 김철수 예비역 장군이 군인 출신이었던 것을 감안하여, 전략적 관점에서 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되었던 전투들을 중심으로 글을 쓰도록 하겠다.
ㅁ죽미령 전투
죽미령 전투는 1950년 7월 5일 오산 북방에서 일어난 최초의 북한군과 미군 간의 전투였다. 이 전투를 통해 미군은 북한군에게 전투의 쓴 맛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언제나 승리의 자신감과 자만심에 차 있던 미군은 죽미령 전투를 통하여 북한군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ㅁ낙동강 방어선 (내선작전 개념)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을 점령한 국군과 유엔군은 워커 장군의 내선작전 개념을 적용하여 방어작전을 실시했다. 즉, 적절한 예비대를 보유하고 있다가 방어선의 일부가 돌파되면 잘 발달된 내부 도로망을 따라 신속히 역습을 실시하여 돌파구를 회복했다. 그리고 우세한 포병과 항공 전력을 이용하여 적의 전방 부대 및 예비전력을 철저히 파괴했다.
이러한 내선작전 개념의 장점은 전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의 주공으로 예상되는 지점으로 빠르게 예비대를 보내 적에게 대응할 수 있는 엄청난 융통성이 발휘될 수 있는 작전인 것이다.
그러나 내선작전 개념은 단점도 존재한다. 내선작전 개념은 예비대의 빠른 기동과 사전 협조 등이 기본 전제가 될 것이다. 만약 기존의 전선에 있는 부대와 예비 지원부대 간의 사전 연락을 통한 협조가 안된다면, 오히려 예비대의 증강은 아군의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부적으로 기동이 신속히 이뤄질 수 있는 도로망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면, 예비대는 방자의 이점을 얻지 못한 채로 적과 대치하여 엄청난 전력 손실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ㅁ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 당시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을 실시하게 되었다. 국군 제1사단으로 미 제25사단 27 연대와 미 제2사단 23 연대가 증원되었다. 1950년 8월 21일 국군 제1사단이 주방어선인 유학산 일대를 탈환하고자 했을 때, 북한군 제13사단이 최후의 발악을 하며 저항했다. 특히 제11 연대 1대대는 강력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해를 입고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1사단에 배속된 미 27 연대는 한국군을 믿지 못하겠으니 후퇴하겠다고 하였다. 당시 1 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즉시 전선으로 달려 나가 국군에 대해 훈시와 격려를 실시하였다. 이후 미군은 전선으로 직접 달려 나가는 사단장의 모습을 통해 국군에 대한 신뢰를 보이며,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작전을 지속 실시해 나갔다. 이는 한·미 연합작전 간의 상호협조와 신뢰가 작전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큰 교훈을 주는 전투가 되었던 것이다.
ㅁ영천지구전투
영천지구전투는 국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이전하는 전환점이 된 전투이다. 이 전투를 통해서 북한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낙동강 전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또한 이 전투에서 국군은 단독으로 전개한 군단급 반격작전을 성공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차후 총공세 작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영천은 대구 및 경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로서 이곳을 적에게 빼앗긴 이후 적이 어느 방향으로 진격하든지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거점전투의 중요성을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ㅁ군우리 전투
군우리 전투는 우리에게 정찰의 중요성에 대해 큰 교훈을 준 전투였다. 6·25 전쟁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일시적 후퇴를 실시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미군은 전차소대를 이용하여 도로정찰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미군을 살상지대로 유인하기 위해 정찰대를 그냥 통과시킨다. 이 과정에서 결국 미군은 군우리 - 순천 도로가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철수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군우리에서부터 매복을 약 10km를 한 중공군에 의하여 미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당시 피해를 입게 된 미군은 육군 2사단으로, '인디언 헤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부대였다. 군우리 전투는 미 육군 2사단이 치명적 피해를 받게 된 ‘인디언 태형’으로 불리며 뼈아픈 교훈을 주었다.
군우리 전투에서의 가장 큰 교훈은 정밀한 정찰의 중요성이다. 앞서 미군은 도로를 이용한 도로정찰을 빠르게 실시한 후에 철수를 하였다. 그 결과 도로 좌우측에 매복해 있었던 중공군을 정확하게 식별하지 못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꼼꼼한 정찰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한반도처럼 산악 지대에서는 더욱 정밀한 정찰이 필요하다. 이를 수행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화력정찰 혹은 산악, 정밀수색 정찰 등 다양한 정찰 방법이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찰을 할 때에 산악에 대한 정찰을 필수적으로 수행한 후 안전한 철수 유도가 보장되었을 때 철수하는 개념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ㅁ장진호전투
장진호전투는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 퇴로를 차단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발생한 전투이다. 흔히 장진호전투의 교훈을 꼽자면 혹한기 전투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장진호전투를 통해 중공군의 진출을 2주간 지연시킨 미 제1해병사단의 역할을 군사적으로 바라보았다.
당시 북동쪽으로 국군 1군단이 청진 방향으로, 미 제7사단이 해산진 방향으로 북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중공군의 북서쪽 압록강을 넘어서 한반도로 깊숙이 침투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공군은 북동쪽으로 진격한 국군 1군단과 미 제7사단의 철수로를 끊고, 고립시키기 위해서 장진호를 거쳐 함흥, 흥남 쪽으로 공격하려고 하였다. 만약 중공군이 함흥, 흥남을 점령하게 되면 국군 1군단과 미 제7사단은 전멸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한 것이다.
중공군의 고립작전을 막은 것은 미 제1해병사단이었다. 미 제1해병사단은 불굴의 정신력과 막강한 화력으로 장진호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약 2주간 지연시켰다. 이를 통해 동해안을 따라 함경북도 지역으로 진출했던 국군 제1군단과 미 제7사단이 흥남으로 집결하여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내가 크게 깨달은 것은 장진호전투 당시의 미 제1해병사단의 정신력은 물론이고, 군사적으로 적의 철수로, 혹은 보급로, 증원로를 사전에 끊는 것이 얼마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끊어먹는 것’은 적을 말라 죽일 수도 있고, 무리한 돌파를 유도함으로써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힐 수도 있다. 중공군도 그것을 노렸을 것이고, 국군과 UN연합군도 그것을 알아서 최대한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한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ㅁ지평리전투
지평리전투는 UN군이 대규모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물러서지 않고 싸워서 승리한 최초의 전투였으며, 공세이전의 계기를 마련한 작전이었다. 이것은 전술적 승리를 달성한 것 이상으로 전 UN군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희망을 갖게 했다. 또한 중공군에 의해 후퇴를 거듭하던 UN군에 다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의 자신감을 심어주어,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은 차후 보다 공세적으로 작전을 진행할 수 있게 된 전투였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당시 지평리는 홍천-여주를 잇는 병참선의 주요 거점이었고, 미 제10군단 방어 지역의 좌측 견부였기 때문에 피아간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당시 지평리에 있던 미 23 연대 프리먼 대령은 지평리를 사수하기 위해 마을을 중심으로 1.6km의 원형방어진지를 구성하였다. 결론적으로 연대 원형방어진지를 통해 대규모 중공군의 공격은 방어가 되어 주요 거점인 지평리를 사수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나는 과거 베트남전쟁 당시 채명신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의 중대전술기지 젼략을 떠올리게 하였다. 나는 방어전술 간의 중대급, 대대급, 연대급에서 원형 거점 방어 진지의 효율성과 장·단점이 무엇인지, 어떤 상황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에 따라 원형거점방어진지를 공격과 방어 간의 전술·전략적 개념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연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ㅁ금성지구전투
6·25 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금성지구 전투는 일명 ‘고지전’으로 불린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군단급 부대의 방어·철수·반격작전을 독자적으로 수행했다. 전쟁 초기에 방어력 발휘를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취약했던 국군의 전투수행 능력이 3년 동안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만큼 향상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전투였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군사적 관점으로 봤을 때 한국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점을 누가 빼앗고, 지켰는지에 따라 많은 전투의 승패가 갈렸다고 생각이 된다. 군사적 측면에서 거점의 중요성은 대단하다. 6·25 전쟁에서 거점을 선점하고, 유지하는 것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도 있고, 증원을 차단하여 고립시킬 수도 있었고, 철수를 차단할 수도, 쉽게 철수를 할 수도 있었다. 또한 방어를 하는 적에게 있어서 어떤 방향으로 공격을 할지 판단하는 것을 방해하게 한다. 즉 전쟁에 있어서 거점을 점령하는 것은 승리를 위한 본질인 것이다.
이를 통하여 나는 ‘거점전투수행 방안’에 대해 연구를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어떠한 거점이 전략적인 거점인지, 어떠한 거점이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는지를 연구함으로써 군사적 식견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가치 있는 거점이 어떤 것이고, 어떤 상황에서 가치 있는 거점인지, 그리고 그 거점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 연구를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ㅁ기타
1) 모택동의 적극적인 6·25 전쟁 참전 이유
가장 대표적인 중공군의 참전 이유는 중국과의 접경지역에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들어오게 되는 것을 희망하지 않았다는 것 일 것이다.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북한을 통해서 완충지대를 형성하기를 희망하는 모택동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당시 중공군은 중국에서 국민당과의 전쟁을 끝낸 지 1년밖에 안된 시점이었다. 그 당시에는 중공군에 국민당 장교들의 비리 때문에 중공군으로 투항한 국민당군이 많았다. 모택동은 그러한 국민당군이 언젠가 다시 변심할 것을 대비하여 그들을 소모시키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2) 국가안보법의 탄생 :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계기로,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 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