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김민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고, 해의 길이에 따라 잠자는 시간도 비례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그렇게 자연의 시간을 살아왔지만,
근대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은 기계의 시간을 살기 시작했다.
도시화된 세상에서 인간은 이제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기계의 시간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도시는 인공의 빛으로 어둠을 대신했고, 자연의 빛이 사라진 도시에서 인간은 기계적인 시간의 상징인 시계가 알려주는 시간에 맞춰 길들여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더 많은 시간 일할 수 있었고,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 행복해졌을까?
기계의 시간은 인간의 비인간화를 가져왔다.
속성상 자연의 시간과 다르기에 자연의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곧 비인간화되었다는 것과 통한다.
'빨리빨리', 그것이 기계의 시간이 주는 메시지다.
자연의 시간이 주는 메시지는 '느릿느릿'이다.
자연의 시간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꽃은 저마다 피어나는 시간이 있으며, 그 시간을 어기지 않는다.
간혹 바보꽃이 있긴 하지만, 그것마저도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기계의 시간은 속성이다. 기다려주지 않는다.
패스트푸드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가공육들은 속성으로 키워 얻은 결과물들이다.
자연의 시간 속에서 자란 닭은 상품성이 없다.
고기도 질기다. 게다가 값도 비싸다.
그러나 기계의 시간 속에서 자란 닭은 상품성이 높다.
고기도 연하다. 게다가 값도 싸다.
양계 시스템으로 A4용지만 한 닭장에서 각종 항생제가 들어간 사료를 먹어가며 속성으로 키우므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까닭이다.
도시는 밤이 찾아와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어둠의 공포로부터 자유를 얻은 대가로 인간은 자연의 시간을 포기하고 기계의 시간을 선택했다.
그것이 정말 인간을 행복하게 했을까?
혹시,
우리도 양계 시스템에서 자라나는 가축들처럼 자본이라는 큰 시스템에 의해 사육되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기계의 시간을 강요당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계의 시간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라도 숨을 고르고 자연의 시간에 삶의 속도를 맞추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면 기계의 시간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기계의 시간을 살아가든 자연의 시간을 살아가든 시간은 무심코 흘러간다.
그것이 시간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분명하다.
기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 중에서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자 하는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다.
기계의 시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때론 자연의 시간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이,
삶을 행복하게 하는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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