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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ul 18. 2017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

# 04  달팽이 목사의 신앙 읽기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모임이다.

건물적인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모인 공동체로서 예수가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걷고자 하는 는 신앙공동체인 것이다. 예수는 가난한 자, 죄인, 사회적인 약자 등 당시 사회에서 구원밖에 있다고 정죄된 사람들의 친구였다. 그들과 동거 동락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공감의 능력'때문이었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정서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적인 약자들과 구원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고 그들과 공감할 때 교회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보수 대형교회들은 공감의 능력을 상실했다. 오로지 교회 확장과 개교회구원주의에 빠져버렸다. 그 결과 대사회적인 선지자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개인구원에 치중함으로써 "예수 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이원론적인 배타적일 뿐 아니라 적대적인 신앙관을 형성하게 하였다. 

공감능력의 상실은,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평생 밥 한번 하지 않았음직한 여성 국회위원이 급식, 조리 노동자들을 '밥하는 동네 아줌마'라고 하더니 만, 그들이 헌법에 보장된 단체행동권을 행사하자 '미친*'라고 했단다. 어느 대기업 회장은 운전이라는 노동을 제공하고 급여를 받는 운전기사에게 '쌔끼야!'를 퍼붓고, 심지어 부친에게까지 '놈'자를 붙여가며 욕설을 했다. 그 일을 통해 대기업 회장의 부친의 얼마나 자식 교육을 못 시켰는지 만방에 드러나긴 했지만, 진정성 없는 사과에 많은 이들은 분노하고 있다. 

아마 그들은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했을 것이다. 지인들에게는 한없이 좋은 엄마였을 것이며, 능력 있는 며느리였을 것이며,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감의 능력'을 상실했기에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것이다. 사과는 했지만, 그들은 솔직히 억울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예로 들었지만, 교회는 사회적인 약자들이 겪는 아픔에 대해 공감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아픔을 극복하고자 할 때에 그들을 짓누르는 권력자들의 편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복음을 떠난 교회가 된 것이다.



교회는 자기가 속해있는 '지역공동체'의 문제에 민감해야 하며, 국가라는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아파하는 이웃들의 문제에 민감해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들은 지역공동체의 문제에 무관심하며, 심지어는 부조리한 권력에 항거하는 것조차도 '정치적인 행위'라며 '오직 하나님만!'을 외치고, 권력자의 편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낳았는데, 어떤 목사들은 반공에데올로기라는 귀신에 씌어  '반공 웅변대회'에 버금가는 설교를 하고, 교인들은 맹목적으로 '아멘!'으로 화답하기도 한다. 이 모든 현상들은 공감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하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소수요, 작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사회적인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사회적인 부조리에 대해 분노하며 싸운다.


공감의 다른 말은 분노다.


그런 교회들이 있어 겨우겨우 한국교회는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며, 지난주에 출석하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라. 사회적인 약자나 이 사회의 불의한 문제에 대해서 신앙인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설교를 들었는지 아니면 주야장천 개인구원과 축복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는지. 


지금, 거리에서 고난당하는 이웃들이 울고 있는데 그들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주하는 설교나 행동이나 심지어는 교인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외침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는 교회였다면,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이름을 빙자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우상의 소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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