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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Aug 17. 2017

삶이 없는 신앙은 위선이다

# 선 자리에서 신앙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원은 없다.


대기업 회장의 운전사들과 군장성의 공관병들에 대한 갑질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개신교회의 교인이며, 평신도로서 가장 높은 직분에 해당하는 '장로'라는 사실이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하고 있다. 교회의 직분은 섬기는 직분이지만, 타락한 오늘날의 교회는 섬기는 직분마저 군림하는 직분으로 대치한 지 오래되었다.


더군다나 소위 '메가 처치'에 해당하는 목사들은 돈과 권력, 섹스 스캔들을 일으켜 법정 구속되는 일까지 벌어지지만, 여전히 그들은 건재하다. 건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맹신하는 이들은 그들이 예수처럼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참으로 신앙 좋은 분들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들의 삶은 왜 그 모양인 것일까?


여기에는 단순하지 않은 신학적인 흐름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종교개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신교는 ‘끊임없이 개혁한다’는 의미를 담아 붙여진 이름이다.
개신교라는 이름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폐습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다. 끝없이 갱신한다는 의미에서 개신교인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가톨릭의 고해성사, 연옥, 면죄부, 보속 등을 없앴다. 그 대신에 ‘만인사제설’에 의해 개인이 하나님 앞에 나가 죄를 고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제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에게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할 수 있다는 신학적인 정당성을 부여한 '만인사제설'은 복음이었다. 그럼에도 초대교회는 공동체에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믿었고, 루터도 그렇게 주장했지만, 사람들의 호응은 별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개신교회는 결국, 아무에게도 죄를 고백하지 않아도 되는 전통을 만들어 냈으며  죄의 문제를 하나님과 개인의 1:1의 문제요,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개인적인 행위로 둔갑시켰다.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사람들에 대해서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으며, 신앙 역시도 하나님과 개인 간의 1:1 관계였다. 개인의 신앙과 구원의 확신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은 중세 교회의 면죄부보다 더 큰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공동체적인 신앙에서 개인적인 신앙으로 넘어가면서, 개인은 자신들이 듣기 좋은 말에만 귀를 기울였고, 구원의 문제도 기복적이고도 개인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복에 머물렀다. 메신저들은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데 열중했고, 교인의 증가는 곧 교회 재정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출석교인을 늘리는데 치중하게 된 것이다.


조금 복잡하지만, 이제 교회에서만 신앙인으로 살아도 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주일성수와 십일조 등은 교인의 의무를 다하는 척도가 되었고, 일상의 삶에서 신앙의 실천은 오히려 걸림돌이 된 것이다. 결국, 한국에서는 Sunday Christian을 양산해 내는 결과로 작용했고, 세상에서는 어떤 비신앙적인 행위를 해도 회개만 하면, 회개의 열매가 없어도 모든 죄가 용서받는 값싼 은총이 편만해졌다.


그러나
단언컨대 삶이 없는 신앙은 위선이다.


갑질로 구설수에 오른 그들이 아무리 교회에서 장로요, 주일성수를 하고, 십일조를 다 했어도, 그리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후에 '회개'를 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회개의 열매가 없다면 그들의 신앙은 허구다. 예수님께서 "위선자들, 독사의 새끼들아!" 지목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신앙인이라면, 자기가 선 자리에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한다.


https://www.facebook.com/minsoo.kim.9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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