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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Sep 11. 2017

고난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다

# 고난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받아들이는 순간


고난에 관한 문제가 풀리자, 비로소 공평하신 하나님에 대한 문제도 선명해진다.


그동안 기독교는 성경을 오해했다. 그리고 이 오해는 어쩌면 지속하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며,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분이실 뿐이시다.


성서에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에게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집필자)의 희망 사항일 뿐, 하나님은 선별하여 누구에는 고난을 주시고, 누구는 고난을 피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시편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런 곳으로부터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악인과 선인에게 햇살과 바람과 비를 공평하게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은 곧 악인도 선인도 고난 중에 처할 수 있다는 고백이다. 우리 삶에서 만나는 고난들은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피해 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혹은 연단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신 것이다. 만일, 어떤 고난도 능히 이겨낼 만한 굳건한 믿음이 있음을 아시고 고난을 주시는 분이시라면 차라리 나는 작은 고난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


‘견딜만한 아픔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고백은 고난을 주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라기보다는, 고난 중에 절망하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다. 만일, 고난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의 불공평함에 항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 땅에서 감내해야 할 수많은 아픔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셨을 때의 일이었다. 소위 ‘착한 치매’에 해당하여, 살아오시면서 자신을 힘들게 하던 일들은 다 잊으시고, 좋은 일들만 기억하셨다. 치매에 걸리신 후 어머니는 항상 밝게 웃는 얼굴이셨다. 그러자 사람들은 어머니의 신앙이 좋으셔서 ‘착한 치매에 걸리셨다’고 위로했다. 그러나 솔직한 내 심정은 ‘착한 치매’라도 걸리지 않는 것이 좋은 신앙의 결과여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 위로받지 못했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3개월 뒤에 의학적인 도움을 받아가며 큰 고통 없이 돌아가신 후 장례식을 치를 때에도 장례를 집례하는 목사는 신실한 신앙을 가지신 분이셨으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셨으니 위로를 받으라고 했다. 하나님을 잘 믿던 어머니에게 폐암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거부한다. 치매나 폐암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육체가 어떤 한계치를 만나고 그것이 어머니에게는 치매와 폐암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흡연과는 거리가 먼 어머니가 폐암에 걸린 원인에 대한 가능성은 ‘가스레인지’에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우리는 가스레인지를 교체했다.


하나님이 어머니를 사랑하셔서 그것을 확증하는 방법으로 치매와 폐암에 걸리게 하시고, 사랑하는 아버지보다 먼저 저 하늘나라로 불러가신 분이시라면,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보다는 멀리해야 하는 분이 아니신가? 그리고 믿은 사람들조차도 고난으로 몰아가시는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은 나쁜 사람들이 형통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시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머니에게 치매나 폐암에 걸리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치매나 폐암은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올 수 있는 질병일 뿐이다. 단지 하나님의 개입은 이때부터이다. 어머니가 그 때문에 이 땅의 삶을 마감하고 우리와 이별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품에 안겨 계심을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필자는 어머니를 예로 들었지만,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고난과 아픔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거기에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으신다. 자연재해 앞에서 믿는 사람만 선별해서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는 없다. 단지, 하나님은 자연재해를 당해 망연자실해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에게 다양한 손길을 통해서 일어설 용기를 주시는 분이시다. 


루터교회 최주훈 목사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기복신앙이란 혼자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아니다. 그런 말은 매력이 없다. 기복신앙의 매력은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면 내가 먼저 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복신앙은 ‘부자 되어서 가난한 사람 돕고, 성공해서 약자 도우라’고 한다. 이런 식이니 매력이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잘 넘어간다. 그러나 세상 권세와 부로 약한 자 돕겠다는 것은 분명히 맘몬의 함정이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언제 이런 식의 삶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셨나?”


기복신앙에 대한 오해만큼이나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다.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 보면서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묻던 이들은 하나님을 오해했다. 그에 대해서 예수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장애를 주셨다는 말씀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이들을 예수가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겠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를 숙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명백하게 사탄의 계략이다.


지난여름 내내 “왜,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의 문제로 고민했다.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며,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분이실 뿐이시라는 깨달음, 그 관점으로 성서를 읽자 희미하게 보이던 부분들이 한결 깨끗하고 명료해졌다.



이런 고민의 과정에 쿠시너의 <착한 사람들에게 왜 나쁜 일이 생길까?>라는 책이 큰 도움을 주었음을 밝힌다.


https://www.facebook.com/wiidplant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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