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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Feb 20. 2018

봄꽃과 보리굴비에 대한 단상

# 봄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따스한 봄날이 속히 오길 

베란다에서 피어난 꽃


산자락과 큰 건물들 사이에 위치한 내가 기거하는 집에는 햇살이 들지 않는다.

아주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고, 아침나절에 삼십 분 정도 머물다 이내 그늘 속으로 숨어든다. 

그런 까닭에 아침 햇살과 따스함을 좋아하는 식물이 잘 자라질 못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난 화분에서는 꽃대가 올라오곤 하는데 그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추위와 목마름을 견뎌낸 난의 노고 덕분이다. 난은 적당하게 꽃눈 처리만 하면 꽃대를 올리고 꽃을 피운다. 더군다나 고마운 점은 난 게으른 사람이 키우기에 적당하다는 것이다. 너무 지대한 관심은 오히려 과잉 사랑으로 난에게는 위협적일 수 있다.


이에 반해 처갓집은 햇살이 잘 드는 베란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 겨울에도 베란다에는 초록 생명들이 꽃을 피우며 자란다. 요즘은 예수 꽃이라고도 불리는 꽃과 게발선인장 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다. 한 마디로 햇살 잘 드는 따스한 집이 부럽다.


낙산공원


따스한 봄, 봄을 더욱더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은 맨 몸으로 겨울을 나야만 하는 사람들일 터이다.

햇볕이 안 드는 곳에서 겨우겨우 생명을 이어가는 연약한 초록 생명들을 내어놓을 날이 언제일까 가늠한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화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식물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우수도 지났으니 이제 다음 주 정도면 바깥 구경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남아있는 추위에 감기에 걸리겠지만, 또 감기를 이겨내며 초록 생명들은 힘을 얻고 또 힘차게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초록 생명이 내게 건네는 희망의 메시지다.


보리굴비


육지 것이기에 보리굴비의 맛을 안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육지 것이기 때문에 보리굴비의 맛을 더 일찍 알 수도 있으니 위의 말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식당, 그냥 이름이 재미있어서 보리굴비를 시켰다.

녹차물에 만 밥과 식당에서 잘 발려준 쫀득 짭짜름한 굴비의 살, 밥그릇에 동동 뜨는 기름은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생선살을 발라주시던 밥상의 풍경을 재현했다. 아마, 추억을 먹는 그 맛에 더 맛있게 느껴졌을 것이다.


중부시장 건어물 센터


몇 번, 아내에게 보리굴비를 사자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비싼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아마도 두 번째 이유가 더 클 터인데 요리하기가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나는 밥상을 차리지 않는 입장이니 간단하다 주장하고, 밥상을 차려야 할 아내의 입장에서는 손이 많이 가는 요리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두어 번만 더 "보리굴비!"하면 아내는 못 이기는 척 머지않아 보리굴비를 밥상에 올릴 것이다.



봄꽃과 보리굴비와 왜 엮였을까?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요즘에 본 것이라는 공통점, 겨울이 뒷모습을 보여주고 봄이 마주오는 계절에 만났다는 것 때문이다. 

나는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저 보리 굴비도 꽃처럼 피어날 수 있을까? 


마른 씨앗이 봄비에 몸짓을 불리고 싹을 틔우듯 보리굴비도 물에 제 몸을 불리면 싹을 틔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하다, 보리 굴비는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생명으로 피어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피어난다는 공통점' 그것이 꽃과 굴비의 경계를 없앤 것이다.


이화동 벽화마을


보리굴비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다를 유영하고 싶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강제로 그물에 들려져 말라버린, 자기를 꽃피우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꽃피우는 희생적인 삶을 강요당하는 보리굴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들은 저들일 터이다.

그들에게 따스한 봄날이 속히 오길....

 


# 본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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