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nalogu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수 Apr 08. 2018

살아계심만으로 감사합니다

# 고단한 삶, 노년의 삶을 사회가 책임져 주어야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존해 계신 친지 어르신은 아버님이 '형수'라고 불렀던 아주머니 한 분이시다. 아버님이 주민등록상으로 1925년생이셨으니, 아주머니는 1920년 초반이실 것이다. 그러니까 거의 1세기에 가까운 삶을 살아오셨고, 머지않아 백수를 누리실 것이다.

사촌의 사촌, 팔촌 정도의 친지로 한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웃같이 가까운 삶을 살았다. 옛날의 어르신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무학이셨지만 기억력이 뛰어나셔서 심지어는 우리 아이들 생일까지도 외우고 계셨다. 어머님과 아버님 생신은 물론이려니와 내 생일이나 아내 생일, 형님과 누님의 생일까지도 기억하시고는 양말 같은 작은 선물을 사들고 오시곤 했다. 


옛날에는 어르신들 생신이면 집에서 잔칫상을 차렸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 집도 외식하는 것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아마도 예고 없이 외식으로 생신상을 대신하던 그 날, 아주머니는 헛걸음을 하셨다. 다음 날, 선물을 사들고 오셔서 "어제 희수 어멈 생일이라 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어서"라고 하셨다.


이후, 빈 집에 아주머니가 오셨다가 헛걸음을 하실까 싶어 부모님 생신에 외식하러 나갈 때에는 꼭 연락을 드려서 모시고 갔다. 아주머니는 심지어 우리 아이들 생일까지도 줄줄이 외우고 계셨다.


광산 김 씨 집성촌이었던 계롱리(지금의 가락2동과 문정동), 내가 아주 어릴 적이었으며 기억도 희미하니 적어도 40년은 넘었을 것이다. 아주머니가 홀로 되신 것이. 아저씨가 돌아가신 후, 가세는 기울었고, 개발이 되면서도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연립주택 하나 분양받는 것으로 그쳤던 것 같다. 그 이후, 지금까지 근근이 살아오셨다. 


이전처럼 농사를 지을 땅도 없고, 점차로 도시화되었다.

젊어서는 이런저런 생계를 위한 일을 하셨지만, 일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는  폐지를 주워가며 생활을 하셨다. 힘들 때면 우리 집에 오셔서 어머님과 대화도 나누시고, 식사도 하시고, 쉬고 가시기도 했다. 어머니는 "형님"이라며 극진하게 대하셨고, 나와 아내도 돌아가실 때에는 손에 조금이라도 용돈을 쥐어드리곤 했다.


어머님과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우리도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고, 아주머니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늘 우리 집을 지나실 때에는 우리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셨고, 주차장에 내 차가 있으면 집에 있겠거니 집으로 올라오셨다. 허탕을 치시기도 했지만, 간혹 만날 수 있었고, 그때마다 모았던 폐지도 실어다 드리고, 용돈도 조금 드리고 하면서 관계를 이어갔다.


2년 전부터는 아들만 집에 있고, 나와 아내는 일 관계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아들을 챙기러 집에 갔고 거주는 다른 곳에서 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아주머니를 만날 일도 줄어들었다. 아들의 말로는 가끔, 아주머니가 오신다고 했다. 아들에게 당부를 했다.


"너 용돈이 없어도 5천 원이라도 쥐어 드려라."


어머님과 아버님 모두 돌아가신 후에는 아주머니만 보면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친지 어르신 들 중에서는 유일한 생존 자시다. 며칠 전, 집에 들렀다가 마침 아주머니를 만났다. 오랜만의 만남에 꼭 안아주시는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손을 잡은데 거친 손의 느낌이 마치 옛날 어머니의 손 같다.


 "사진 찍어드릴게요."


영정사진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전에는 왜 사진을 담아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싶기도 했다. 이미 영정사진은 마련해 놓으셨겠지 하면서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지막 사진처럼 아주머니의 사진도 간직하고 싶었다.



손가락 마디마디 삶의 애환이 파고들어 굴곡진 인생을 보여준다. 며칠 전, 문득 내 손을 보다가 무척이나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 손이 내 삶의 흔적이므로. 고등학교 2학년까지 농사짓던 어머니를 도왔고, 이후에 나이가 들어서도 텃밭을 가꾸었으며, 요즘 도시에 살면서도 흙을 만지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손을 보니 이틀 전 질경이를 다듬다 물든 풀물이 갈라진 손가락 사이사이 까맣다. 거친 손이지만, 내 손은 예민하고 부드럽고 재주도 많다. 내 삶을 풍성하게 하는 다양한 것들이 나의 거친 손을 통해서 나온다. 붓글씨를 쓰기도 하고, 기타를 치기도 한다. 손으로 하는 일은 자신 있는 편이다. 그래도 아주머니의 손에 비하면 내 손은 부잣집 마나님의 부드러운 손이다.


폐지값이 형편없이 떨어졌다고 한숨을 쉬신다.

그런데 아무리 값이 떨어지고 똥값이 되어도 그것 외에는 수입이 없으니 그냥 보이면 줍는다고 하신다. 내 지갑에는 이만 원밖에 없었다. 그걸 쥐어드리자, 아주머니는 눈물을 그렁그렁하시며 "맨날, 보기만 하면 용돈을 주니 얼마나 고마워, 용휘(막내)도 아범을 닮아서 나를 보기만 하면 용돈을 주는데... 고마워."하신다.

그런데 사실, 내가 착해서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힘겹고 고단한 삶이라도 살아계심에 감사하기 때문이고, 아주머니를 보면서 어머니의 흔적을 볼 수 있어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뿐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그분들이 해야 할 몫을 내가 했을 뿐이고. 


초고령화 사회, 나는 그것이 별로 탐탁지 않다. 뭔가 결핍되고 결여된 상태에서 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갑자기 여름이 올 것 같더니만 꽃샘추위가 달려오던 봄에 제동을 건다. 날씨가 풀리면 부모님 묘소에 가서 인사도 드리고, 봄나물도 해와야겠다. 냉잇국 쑥국이라도 끓여서 식사라도 대접할 수 있는 날이 있길 기대하면서.


#이 글에 사용된 사진의 저작권은 필자입니다. 이 글은 오마이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 일도 없는 것에 대한 감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