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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un 29. 2019

시편 묵상 - 시편 7편

제가 만든 함정에 빠져서

시편사색 

원수들 방자히 무고하며 멸시하여 까닭 없이 저를 뒤흔듭니다

저를 대신해 적들과 싸워주시고 도리에 어긋난 저들 성케 마옵소서

악인은, 

아무리 애쓴들 날로 더 졸렬해져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되리

남에게 던진 돌 저가 맞아 상하리라


개역성경

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메시지

하나님, 일어나소서.

하나님, 깨어나소서.

남에게 끼친 해악은 맞불이 되어 돌아오고

남에게 가한 폭력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That’s what happens: mischief backfires; violence boomerangs.


선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라고 평안함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세상이 그리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의 모습이 자신에게도 있고, 제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그 안에 선함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생끼리 판단하고 정죄하며 ‘정의의 칼날’을 휘두른다고 할지라도 한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를 무고하게 하는 원수의 모습이 또한 타인을 대하는 나의 모습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시편 7편의 시인은 무고한 자들이 자신을 괴롭힐 때, 스스로 싸우기보다는 하나님을 찾는다. 공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려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시편의 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무책임하고 무기력하다고 할 만큼 ‘하나님만’ 찾는 이유다.


<시편사색>에서는 시인이 ‘사필귀정의 도리’를 되새기며 오로지 하나님만 두려워한다고 풀이한다. 굳이 원수를 갚지 않아도 악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악의 열매를 거둘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불의한 것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선한 것이 이기게 된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있는데,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뒤따르고, 악한 일에는 악한 결과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본질에서는 사필귀정과 인과응보의 종교는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구원의 자리에 설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을 헛된 것으로 치부하지는 않는다. 은혜로 구원받지만, 도덕적 윤리적으로 막살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까닭 없이’ 흔들릴 때가 있다.

인간은 유리그릇처럼 연약하고 사기그릇처럼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존재다.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는 담대해야 하지만, 타인의 고난에 대해서 너무 쉽게 ‘견딜만한 아픔’이라거나 ‘일어나!’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아주 작은 아픔 때문에 금이 갈 수도 있고, 깨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자신의 아픔에는 민감하면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이들이 있다.

성서에서 악인은 도덕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이들이 악인이다. 성서는 ‘이웃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에 이르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이웃의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이들, 자신들이 누리는 것은 당연한 신의 선물이요, 이웃이 당하는 고난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라고 믿는 이들, 그들이 악인이다. 결국, 그들도 자신이 조롱하던 타인의 처지에 서게 되면 그들의 조롱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때 그 누구도 그들의 아픔 때문에 슬퍼하거나 탄원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

나는 지금도 진상규명을 위해 단식투쟁을 할 때 그들을 조롱하며 폭식 투쟁을 하던 이들을 잊지 못한다(6월 25일 그들을 고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드시 죗값을 물어야 한다.). 그들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이며, 이 땅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패륜아들이다. 그들은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이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시 7:14)”라는 말씀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임져야 할 이들을 두둔하고 그들에게 무죄 선고를 내리는 재판관들도 있다. 


아직, 하나님의 정의가 멀기만 한 세상인듯하다.

그리하여 시인은 ‘일어나시라고, 깨어나시라!’고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에 악인은 비웃으며 “하나님이 넘어지시기라도 하시는 분이시냐, 주무시는 분이시냐?” 하나님을 조롱하지 말라며 탄원자들을 조롱한다.


불혹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원수들을 직접 응징하고 싶었다. 그러면 속이 시원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젠 그런 마음이 없다. 그런 일에 마음 쓰고 싶지도 않지만, 악한 자들의 끝이 뻔한데 굳이 내 손에 피를 묻힐 일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더 중요한 이유는, 나에게도 악인의 모습이 있음이요, 나 하나 바로 살기에도 경황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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