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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un 30. 2019

시편 묵상 - 시편 8편

고요한 가운데 바라보라


시편사색 

고요한 눈매로 세상 이치 살펴보면 천지 기상의 오묘함이여

상서로운 기운은 하늘에 찬란하고 별과 달 요요히 빛을 발하네(3)


개역성경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2)


메시지

그리고 한없이 작은 내 모습에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걱정하시고

우리 인생길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살뜰히 살피십니까?(4)

Why do you bother with us?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해 주셨음을 고백하시는 시다.

창세기에서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숨결’을 통해서 생명을 주시고,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창조의 동역자로 삼아주셨다.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징 몇 가지가 있다.


필자는 불과 언어와 죽음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만이 가진 특질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 온갖 험한 말로 이웃을 해하고, 남의 생명을 탐하는 자,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자는 짐승만도 못한 자다. 자신이 누리는 권력과 돈과 명예 등을 이용해서 타인의 행복을 갈취한다면 그 역시도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사는 자라 할 수 있으리라.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靜觀(정관)’이 필요하다. <시편사색>에서 송대선 목사는 ‘靜觀’을 ‘고요한 가운데 들여다봄’이라고 해석했고, 이런 과정에서 편견이나 선입견이나, 어줍잖은 지식이 발 들일 틈이 없다고 한다. 


필자는 정관을 ‘맑게 바라보기’라고 읽었다. 그렇게 맑은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창조세계를 바라보면 ‘진실’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진실이 낯설다는 점이다. <시편사색>에서는 ‘당황스러움과 놀람’이라 번역했다. 그렇다. 진리는 익숙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낯선 것이다. 낯설다 못해 당황스럽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고자 할 때에 일상에서 옳다고 여겨지던 수많은 것들과의 갈등에 직면하게 된다. 그 일상은 그동안 우리가 살아오면서 습득한 것이기도 하고, 이 사회가 요구하는 ‘객관적인 진리’ 기도 하다. 진리가 당황스럽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객관적인 진리’가 진리가 아니라고 도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그것이 진리인지 증명되지도 않았다. 더더군다나 ‘진리’는 속성상 ‘알 수 없는 신비’다. 


도덕경 1장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을 떠올린다.


‘도’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미 인지할 수 있거나 분석 혹은 정의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는 궁극 실재 혹은 형이상학적 존재로서 우리의 제한된 표현양식을 초월한다. 직관 혹은 체험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즉 ‘無名’,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혹은 ‘이름 없는 것’이 ‘도’다.

‘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신비의 측면과 현상의 측면이 그것이다. 신비의 측면은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無’, 현상의 측면은 욕심을 가진 이들이 볼 수 있는 ‘有’라 할 수 있다. 우리는 有, 현상계를 보며 살아간다. 현상계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도 아름답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신비요, 기적이라고 고백하는 이들도 많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그 有의 세계를 있게 하는 無의 세계를 보는 사람은 얼마나 큰 신비를 보겠는가?


정관은 ‘변하는 것 가운데 불변의 것을 보며 익숙한 것 속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나는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것이 <시편사색>에서 ‘고요한 눈매로 세상 이치 살펴보면’으로 해석된 부분이다.


<메시지>에서는 이런 깨달음의 정점에서 ‘한없이 작은 인간의 모습’에 놀라고, 그 ‘한없이 작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놀란다. 강조점은 여기에 있는 듯 해석되었지만, 이것을 깨닫기까지 ‘고요한 눈매’로 세상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결과물이므로, ‘靜觀(정관)’이 신비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 된다.


<개역성경>에서 제시한 2절의 말씀은 현실적인 눈으로 보면 도저히 승산 없는 싸움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이들로 상징되는 원수와 보복자들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을 통하여 잠잠하여질 것이라 시인은 고백한다. 세상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기에 신비할 뿐이다. 그리하여 진리는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 있고,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 있기에 우리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고요한 가운데 바라봄(靜觀)’으로 들어가려면, 우리의 바쁜 걸음을 조금 천천히 멈추어 쉬어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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