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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ul 01. 2019

시편묵상 - 시편 9편

‘홀로 감당해야 하는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시편사색 

하소연할 곳 없어 고통받은 이 야훼 자비 덧입고 피난처 되어주시네

주님은 성도들의 보호자니 주 믿는 이 외로이 버려진 적이 있는가?(9-10)


개역성경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였나이다(4).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시오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9)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12)

     

메시지

주께서 모든 일을 바로 잡으셨고

내가 필요로 할 때, 곁에 계시며 변호해 주셨습니다(4).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잡으시고

세상의 혼란을 살피시며 바로잡으시는 분(7)

God holds the high center, he sees and sets the world’s mess right.



‘하소연할 곳 없는 고통’ 속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내 편이라고는 없고, 나를 이해해 주는 이도 없고,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은 오롯이 홀로 감내해야 하는 시간. 사랑하는 사람이나 이웃이나 동료가 없어서도 아니고 그들이 악해서도 아니다. 


‘홀로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 주어질 때가 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해 들어와야 할 시간이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할 시간이다. 이웃과 사랑하는 이들과 동료의 애정 어린 조언조차도 아무 소용이 없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에 처해있는 시인을 개역성경은 ‘가난한 자’라고 번역한다. 탁월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개역성경에서의 ‘가난’은 단지 물질적인 가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물질적이기도 하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도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물론, 후대에 ‘마음이’라는 말이 첨가되면서 본래 산상수훈의 의미가 퇴색되긴 한다. 그러나 시편에서 ‘가난한 자’라는 표현은 단지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청빈한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니 탁월한 번역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시편 9편의 시인은 가난한 자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압제당하는 자로부터 요새가 되어주시는 하나님,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바로 세워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홀로 감당해야 하는 시간’에도 함께 해주시는 분,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피할 수 있는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1절을 요약해 보면 ‘주님이 행하신 이들을 감사하며 노래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신비한 섭리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본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을 노래(찬양)할 수밖에 없다. 이 노래는 목청으로 드리는 노래가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노래다. 


‘삶으로 드리는 노래’는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상이 악하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을 호락호락 놔둘 리가 없다. 

자신들의 가치관과 다른 삶을 살아감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흔들어버리는 이들을 어찌 방관하겠는가? 

그리하여 악한 이들은 곳곳에 덫과 그물을 쳐놓고 의인을 기다린다. 

그리고는 자기들 세상이라고 허세를 부린다. 


덫과 그물에 빠지지 않고는 살아갈 재간이 없어 보이는 현실, 그것이 시인이 토로하는 ‘하소연할 곳 없는 고통의 자리’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들이 처놓은 그물과 덫에 그들이 걸려 넘어지도록 하실 것이다. 지금 현실은 ‘하소연할 곳 없는 고통’이지만, 이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허세를 까발려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시편 9편도 희망의 노래가 된다.


시편 9편을 묵상하면서 거의 십 년 전,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에 몰렸던 날들이 떠올랐다. 동료와 가족 모두 내 편이었으나, 나는 홀로 고독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를 힘들게 하는 힘은 너무 컸다. 그의 허세를 까발리려면 죽음으로 호소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싶었다. 그러나 북한산 품에 안겨 나무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생명이 고작 그러한 악인의 허세를 드러내어 그를 파멸시키는 것과 바꿀 만큼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미쳤다. 나는 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는데 오랜 시간 지나 보니 더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소연할 곳 없는 고통’ 속에서는 그 일만 바라보지 말고, 잠시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신비를 바라보자. 그 안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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