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김민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요즘 금수저 은수저 논란이 거세다.
아예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로 태어난 이들이 있고, 은수저로 태어난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경쟁사회를 살아가지만, 공평한 경쟁은 없다는 자조감 섞인 사회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금수저 은수저론'인 것이다.
성서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집에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으며 나무 그릇 질그릇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그릇은 다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쓰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왜 나는 금그릇이 아니냐?"고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그릇 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끗한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깨끗하고, 비어있지 않으면 무슨 그릇이든 쓸모없다.
오로지
깨끗한 그릇만이 사용될 수 있다.
금수저냐 은수저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깨끗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왜 나는 금수저가 아니냐고 불평하면서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수저이든 '깨끗함'으로 자부심을 가지면 안 되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간혹 나는 어떤 그릇인가 생각한다.
금그릇은 부담스럽다.
은그릇도 그렇다.
질그릇이나 나무 그릇이 나는 좋다.
아니, 늘 식탁에서 자주 사용되는 그릇이 좋다.
그것이 그릇의 사명이고, 식탁에서 자주 사용되는 그릇치고 더러운 그릇은 없으므로.
이른 아침 잠시 잠깐 빛나는 이슬방울, 그들은 자신이 왜 이슬이냐고, 물방울 보석이 아니냐고 불평하지 않는다.
사실
자본의 사회, 경쟁의 사회, 직선의 사회에서 공평한 경쟁은 없다.
맘몬의 속성이며, 자본의 속성은 가진 자들에게 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수저 은수저론'에 고개를 끄덕일수록 우리는 더 절망에 몸서리쳐야 할 것이다.
내가 은수저인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나무 수저라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더럽다는 것, 그래서 수저로서 쓸모없다는 것이 가장 부끄러운 것이다.
꽃은 다른 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안에 품은 생명을 피울 뿐이다.
그리고 매일 그들은 자기가 피워낸 꽃을 보며 '내 안에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나는 어떤 그릇인지 혹은 어떤 수저인지 모른다.
그래, 금수저가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대다수는 아닐 것이다. 금수저는 흔한 수저가 아니므로.
그렇다고 절망할 것인가?
아니, 어떤 그릇이냐 혹은 수저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깨끗한가?"가 중요하다.
어떤 그릇이냐에 연연하는 것보다
'나는 정말 깨끗한 그릇인가?
돌아보는 것이
우리의 삶을 훨씬 더 행복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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