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은 말은 비수다

욥기 4장 거룩함을 옷 입은 거짓

by 김민수

침묵은 끝났고, 탄식은 쏟아졌다.
욥은 하나님을 향해 입을 열었고, 고통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 말은 하나님을 향한 저주는 아니었지만,

침묵보다 더 무거운 존재의 무너짐이었다.


그때,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엘리바스였다.
그는 친구들 중 가장 연장자이고, 지혜의 언어에 익숙한 자이며,
오래된 정통의 교리를 가장 신실하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한다.

“누가 그대에게 한 마디 말해 본다면, 그대, 지겨워하려나?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4:2)


그 말은 조심스럽지만, 이미 욥의 고통에 틀을 씌우려는 전조였다.
엘리바스는 욥의 아픔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설명하려 한다.


“그래, 그대가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고,

맥이 풀린 손을 강하게 해주곤 했다네.

넘어진 사람을 그대가 말로 일으켜 세웠고,

휘청거리는 무릎을 튼튼하게 해 주곤 했다네.

그런데 이제 어려움이 그대에게 닥치자 지쳐버리는군.

그대를 건드리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군.”(4:3–5)


이 말은 칭찬이 아니라 비아냥에 가까운 지적이다.
“당신도 별 수 없군. 그런데 그 하나님은 왜 당신을 돕지 않소?”


그리고 결정적인 진술이 이어진다.

"나는 보았네, 옳지 못한 일을 꾸미는 사람들을,

또 불행을 뿌리는 사람들을!

그대로 거두어 들이더군.”(4:8)


엘리바스는 단언한다.
“고난은 죄의 결과다.”


이 말은 고대 지혜 문학 전통에서 비롯된 인과응보의 정리된 언어다.
즉, 욥이 고난당하는 이유는 분명히 그가 알지 못하는 잘못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욥에게 어떤 공감도, 위로도, 하나님과의 신뢰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답처럼 보이는 폭력이었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말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고자 환상을 말한다.

“나에게 말씀이 몰래 다가왔고, 내 귀에 그 속삭임이 들렸네.....

무서움이 나를 덮쳐 떨었고, 나의 많은 뼈들도 무서워 떨었다네.....

그러고는 소리가 들렸다네.

'사람이 하나님보다 올바를까?

인간을 만드신 분보다 인간이 깨끗할까?”(4:12–17)


그는 이 환상을 통해 단언한다.

“너는 죄인이다. 그러니 고난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장면은 인간의 고통에 초월적 해석을 덧씌우는 장면이다.
욥은 지금 인간적 고통의 자리에서 신의 침묵과 마주하고 있는데,

엘리바스는 전통적인 교리적 정의로 그 침묵을 해석하고 정리한다.


엘리바스는 거룩한 신학의 옷을 입고 있지만,

사랑 없는 거짓진실을 말하는 자다.
그의 논리는 정연하지만,

자비는 그 정연함 속에서 길을 잃었다.


엘리바스는 악한 자가 아니다.

교만한 자도 아니다.
그는 그저 너무 오래 정통신학을 곧이곧대로 믿어온 사람일 뿐이다.

그에게 고통은 ‘뜻이 있는 징계’이며,

신은 공정한 분이고,

사람은 그 공정성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 믿음이 욥의 자리 앞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자신이 받는 고통이 그런 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엘리바스의 말은

논리적이었고, 경건했으며, 오래된 전통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욥의 상처를 더욱 깊게 할 뿐이었다.
욥은 위로를 원했지만,

엘리바스는 자신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자기의 말을 들고 왔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은 이런 말을 했다.

“신학이 전통을 현재의 언어로 번역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스스로를 동시대인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1)


‘현재의 언어’란 부당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의 고난을

감지하고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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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자리에는 정답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사람이 필요하다.
침묵이 끝난 자리에, 현재의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작가이며 신부인

‘존 오도나휴(John O'Donohue 1956~2008)’의 시 중에 ‘병이 찾아온 친구를 위한 기도’가 있다.


당신의 고통 앞에
섣부른 말들이 침묵을 배웁니다.

우리는 당신 옆에 있지만,
고통은 오롯이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외롭지 않기를 바랍니다.

...

이 시간이
의미 없는 질문보다
깊은 동행으로 채워지기를,
말보다 더한 존재로
당신 곁에 머물기를.2)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말들은 현재의 언어로 번역되지 못했다.

그래서 비수가 되어 욥을 찔렀다.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참고문헌:

[1] 위르겐 몰트만,『오늘의 신학 무엇인가』, 차옥숭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89, p.9.

[2] John O'Donohue, 『To Bless the Space Between Us: A Book of Blessings』, Doubleday,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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