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하나님, 낯선 하나님

욥기 5장 설명되지 않는 고통 앞에서 만나는 하나님

by 김민수


엘리바스는 멈추지 않는다.
그의 말은 이제 도덕적 확신을 넘어 신학적 계시처럼 포장된다.
그는 점점 더 자신 있는 어조로 말한다.
욥의 탄식과 의문, 고통은 하나님의 징계일 뿐이라고.


"이보게나, 복 있다네,

하나님께 벌 받는 사람은!

그러니 샷다이(전능하신 분)의 징계에 맞서지 말게나.

하나님은 상처 나게 하셔도 싸매어 주신다네.

때려 부수셔도 손수 고쳐 주신다네."(5:17–18)


이 말은 정답처럼 들린다.
너무도 그럴듯하고, 위로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말이 너무나 정확하고 신학적이기에, 오히려 잔인하다.


엘리바스는 누구인가?

그는 윤리적 지혜의 수호자다.
그는 오래된 교훈을 충실히 외우는 자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본 적이 없는 자처럼 말한다.

그는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로 단정하고,

그 징계가 곧 하나님의 손길이며,

결국은 회복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그의 세계에는 설명되지 않는 고통이 없다.


“네가 지금 당한 고난은 죄에 대한 응보이며,
하나님은 너를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한 사람의 고통을 교리로 덮어버린다.


엘리바스는 확신에 찬 신학을 말하지만,

그의 신학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제거된 이론일 뿐이다.


엘리바스는 믿는다.

고난은 훈련이며, 하나님은 때리시지만, 싸매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다시 상처는 회복되고 복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일면의 진실일 뿐이다.


그러나 욥기는 그 일면이 보편적 진리로 오용되는 것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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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늘 죄에 대한 징계의 결과인가?”

“모든 고통은 결국 회복으로 이어지는가?”
“싸매어지지 않고 회복되지 않는 상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참사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유가족들

엘리바스의 말에 이렇게 답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상하게 하신 뒤에 고치신다고요?

우리 아이들은 고쳐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회복될 수 없습니다.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우리는 죄인으로 취급받는 것 같아요.”


이 절규는 욥기의 근본적 질문과 겹친다.
‘하나님의 뜻’이라며 덮는 말이, 고통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다.


설명은 위로가 아니다.

고통의 이유를 설명할 때,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은

그가 아직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시지 않는다.

그냥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토닥여주며, 함께 우신다.


하나님은 고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고쳐주시지 못하므로 함께 울어주실 뿐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여기에서 온다.

시편의 많은 기도는 싸매어지지 않은 상처를 그대로 내어놓는다.

욥기의 하나님도 그렇다.

말없이 끝까지 듣고 계시는 분이다.


엘리바스는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라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고통 받는 자를 위로하지 못한다.
고통 받는 자는 회개를 요구받기 전에, 먼저 이해받기를 바란다.


고난의 자리는 정답을 요구하는 자리가 아니다.

고난의 자리는

함께 묵묵히 머물러주는 사람,
말을 아끼는 사람,
상처를 싸매기 전에 함께 울어주는 이들이 필요한 자리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두이노의 비가』,

특히 제1비가에서는 ‘함께 있어주는 존재’의 결핍과 인간의 고통을 깊게 성찰한다.


“누가, 내가 울부짖는 것을 듣는가?

천사들의 질투 속에서,

심지어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나를 들어줄 수 있을까?

내가 내 마음을 쏟아 붓는 이 외침이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자들은 더 이상 가까이 있지 않고,

집은 낯설어지고,

남겨진 우리는

끝없이 질문하며 살아간다.”


아무도 시인의 울부짖음을 듣는 이 없고,

함께 머물러 줄 이도 없다.

고통의 시간에 함께 있어줄 존재의 부재는 고통을 더 깊게 만든다.

그야말로, 슬픈 노래다.


엘리바스가 처음 욥을 위로하러 왔을 때,

말없이 칠일주야를 그의 곁에 머물러 있었을 때에 그는 위로자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침묵을 깨고 말함으로 위로자에서 고통을 주는 자가 된다.

자신의 신학으로 욥을 정죄하기 시작한 것이다.


리처드 로어(Richard Rohr, 1943~)는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더 낯선 분이실 뿐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도 더 낯선 분이시다.”1)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신학의 틀에 갇히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익숙한 도식과 정답 너머에서, 고통 받는 자 곁에 낯설게 다가오신다.

욥은 지금 한 없이 낯선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엘리바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낯섦이 없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익숙한 존재로 단정짓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낯설고 깊어지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다시 알아가는 여정 아닐까?


참고문헌:

[1] 리처드 로어, 『성경 속에 숨겨진 지혜들』, 정준화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p.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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