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6장 고통은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깨졌고,
탄식은 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말은 항변이 되어 불쑥 터져 나온다.
욥은 이제 더 이상 눈물만 흘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고통이 얼마나 무거운지,
자신의 절망이 얼마나 깊은지를 말하기 시작한다.
"아, 내 속상한 것의 무게를 제대로 달아 본다면!
나의 불행을 저울에 한꺼번에 올린다면!
지금의 바닷모래보다 더 무겁겠지.
그 때문에 나의 말이 생각 없이 나갔다네."(6:2–3)
욥의 고통은 수치화할 수 없는 무게다.
그는 말한다.
“너희가 내 말을 가볍게 여기는 이유는,
내 아픔의 무게를 모른 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욥은 친구들에게 묻는다.
“네가 나를 정죄하기 전에, 내 안의 쓰라림을 보았느냐?”
욥은 이제 더 이상 침묵 속 고난의 상징이 아니다.
그는 자기 고통의 해석자로 서기 시작한 인간이다.
그의 말에는 자조도, 분노도, 슬픔도 스며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려는 생의 의지가 꿈틀거린다.
"나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버텨 내겠는가?
나 스스로 어찌해 볼 수 없지 않은가?" (6:11–13)
이 탄식들은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말하고 있다.
말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말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것은,
신앙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표시다.
욥은 엘리바스의 정답처럼 말하는 조언을 거절한다.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말에 반박한다.
“고통은 그렇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욥의 항변은 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은,
정답을 강요하는 위선을 폭로하는 언어다.
"절망한 사람에게는 벗의 한결같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네.
올곧은 말이 왜 이다지도 고통스러운지!
절망한 사람은 바람에게 하소연했을 따름인데."(6:14–26)
욥은 엘리바스가 옳다고 믿는 전통 신학의 견고한 틀을 흔들고,
고통 앞에서 신학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제 욥은 고통의 진실을 말하는 자가 된다.
욥의 폭로는 반신앙적인 것이 아니다.
욥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욥의 폭로는
신앙의 깊은 심연에 다다른 이가 고백할 수 있는 심연의 언어다.
욥은 친구들의 주장을 고발하며,
자기 고통을 자신이 증언하려 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고난에 대한 타자의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고통의 무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려는 자만이,
고통 받는 이와 함께 설 수 있다.
욥은 항변한다.
자신의 항변은 살기 위한 말이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자기 존재의 절규다.
항변은 변명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아직 하나님 앞에 말하고 싶다”는 가장 깊은 울림이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 고통을 당하는 게 너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아?”
욥은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을까?
“네가 내 입장이라면 무슨 소리를 할는지 보고 싶구나.
당해봐야 알 거다.”1)
김수영 시인(1921~1968)의 <풀>이 떠오른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그렇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더 울고,
다시 일어선 존재.
그가 욥이다.
고통은 설명되기보다 ‘견디어지는’ 것이다.
욥은 그 견딤 속에서, 설명 대신 울부짖음으로 하나님을 부른다.
믿음은 때로 침묵이 아니라, 끝까지 말하려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주:
[1] 사뮈엘 베게트(Samuel Barclay Becket, 1906~1989),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옮김, 민음사, p.12.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대화를 인용하고, 변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