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8장 근원적인 신앙은 공로가 아니라 선물이다
욥의 친구 중 두 번째로 입을 연 빌닷은,
위로가 아닌 정죄의 언어로 말문을 연다.
그의 말은 엘리바스보다 더 단호하고, 차갑다.
그는 심지어 욥의 자녀들까지 언급하며, 그들이 죽은 것은 죄 때문이었다고 단정한다.
"그대의 자녀들이 주님께 잘못을 저지르자,
그들이 죄의 손아귀에 들어가 내버려 주신 것이네." (8:4)
빌닷의 신학은 단순하다.
‘하나님은 정의롭다.
고난은 죄에 대한 징벌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복이 돌아올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욥 자신도 처음에는 이러한 인과응보의 논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자녀의 죽음을 앞두고 매일 번제를 드리며 그들이 혹시라도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까 염려했고(욥 1:5),
고난 속에서 자신의 죄를 되묻기도 했다.
그러나
욥의 위대함은 그 논리에 갇혀 있지 않고,
점차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틀을 넘어서는 데 있다.
빌닷의 말은 오늘날에도 익숙하다.
“믿음으로 살면 잘 된다”,
“회개하면 복이 온다”는 식의 말은 교회 안팎에서 흔히 들린다.
전통적이고 정답처럼 들리지만, 바로 이곳에서 위험이 시작된다.
이러한 말들은 전통적인 지혜문학의 논리,
즉 ‘선은 상을 받고 악은 벌을 받는다’는 구조에서 비롯된다.
잠언, 시편 등에서는 이러한 공식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욥기는 바로 이 고정된 공식을 해체한다.
의로운 자가 고통 받는 현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
그리고 인간의 해석 불가능한 고난 앞에서
욥기는 ‘지혜의 전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김기석 목사는 빌닷의 말을 이렇게 정리한다.
“빌닷의 말에는 온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대전제 하에 발화되는 그의 말은 비정하기까지 합니다. 그 속에는 여백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우리의 항변을 그는 가볍게 무질러 버립니다.”1)
욥의 친구들은 고통을 교리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고통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울어야 할 현실이다.
빌닷은 해석하려 했고, 욥은 항변하려 했고,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오늘 날에도
잘 되면 복 받고, 죄 지으면 망한다는 번영신학은 편만하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
"죄 지으면 벌 받는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
“믿음으로 살면 복 받고, 죄 지으면 망한다”는 식의 말들은
전통적인 지혜문학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욥기는 바로 이 지혜의 전제를 뒤흔든다.
의로운 자가 고통 받고, 하나님은 침묵하며, 고난은 인간의 논리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욥은 죄가 없었다.
그러나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월터 부루그만(Walter Brueggemann, 1933~)은 “근원적 신앙은 공로가 아니라 선물”이라고 했다.2)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조건과 공로를 초월해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은총임을 뜻한다.
이 은총은 고난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임재의 은총이지, 형통이라는 결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적용하면 욥이 당하는 고통도 죄의 결과가 아니며,
누군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욥과 같은 고통을 당하는 것 역시도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누군가는 고난 중에 거할 수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수도 있는 가능성 앞에 놓인 것뿐이다.
자신이 의로워서 복을 누리고, 불의하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식의 신앙은 근원적 신앙과 거리가 멀다.
빌닷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도 남긴다.
"그대의 처음은 하찮아도,
그대의 나중은 매우커질 것이네"(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개역성경 8:7)
이 구절은 한국 사회 일반에서도 많이 인용되는 성경 구절 중 하나다.
사업장, 식당, 교회 현수막, 새해 다이어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는 기독교신앙과 관련이 없는 이들도 이 구절을 좋아한다.
이 구절이 맥락에서 벗어나 인용될 때, 신앙은 현실과 무관한 도구로 전락한다.
말씀은 삶을 해석하는 빛이어야 하지만, 때로는 욕망을 정당화하는 장식이 되고 만다.
빌닷이 내뱉은 이 말의 진실은 '정의로운 하나님'을 말하면서,
'고통 받는 욥의 현실'을 무시한 말이고, 욥을 모욕하는 말이었다.
이 말은 회개하면 창대해질 것이라는 조건부 번영의 언어이며,
고통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가득찬 독설인 것이다.
욥기 8장 7절의 전체 문맥을 무시하고,
빌닷이라는 ‘잘못된 신앙적인 말’에서 떼어내어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성경 구절로 취사선택되면
신앙의 왜곡을 가져오고, 신앙을 소비되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빌닷은 욥을 설득하려고만 했지, 욥의 입장에서 욥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욥의 말을 듣기 전에 하나님의 질서를 말했고, 그 질서 속에 욥의 자리를 강제로 배치했다.
“잘 살면 복 받은 것이고, 망한 것은 죄의 결과다”라는 신학은
단순하고 강력하지만, 고통 받는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간다.
욥은 창대한 인생을 약속받기보다, 고통 속에서도 자기를 증언할 수 있기를 원했다.
진짜 복된 신앙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사는 것이다.
빌닷은 위로자로 왔지만 이제 고통을 주는 자로 서 있다.
그는 위로의 방법을 모르는 자다.
이해인 수녀(1945~)의 <위로의 방법>이라는 시를 떠올린다.
“아픈 사람 앞에서
아픈 얘긴
너무 많이 하지 말아요.
기도로 큰 소리 내지 말고
그냥 속으로만
해 주는 게 더 편할 적도 있습니다.
......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위로의 좋은 방법인 것 같답니다.3)
위로는 해답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마음이다.
고통 앞에 섣부른 교리가 아니라,
말없이 함께 울어주는 존재야말로 참된 신앙의 얼굴을 가진 존재다.
주:
[1] 김기석, 『아! 욥 – 욥기 산책』, 꽃자리, 2022, p.121.
[2] Walter Brueggemann, 『예언자적 상상력』, 김기철 옮김, 복 있는사람, 2017, p.209.
[3] 이해인, 『사계절의 기도』, 분도출판사, 2020, pp.114–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