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 항변

욥기 13장 고통 속에서 정중하게 말할 수 있는가

by 김민수


욥은 이제 하나님을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친구들에게 먼저 분노를 터뜨린다.
그들의 언어는 위로가 아니라 고통을 덧입히는 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대들은

거짓을 가지고서 덧칠을 하는 사람들이요,

모두 돌팔이 의사들이네.......

그대들은 하나님을 위해 나쁜 말을 하고,

그분을 위해 속이는 말을 하려 하는가?"(13:4,7)


그는 친구들의 말을“하나님을 위해 하는 나쁜 말”(새한글성경)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하는 말”(새번역), 위선적 신앙의 언어라고 정죄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이 아니라,

자신들의 도덕적 틀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언설이라는 것이다.

욥은 친구들의 말이 고통 받는 자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자기 신학을 유지하기 위한 구조물에 불과함을 간파한 것이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욥의 친구들은 그분을 속이는 말을 한다.


욥은 말한다.

"그대들이 아예 입 다문다면!

그것이 그대들에게 지혜로움일텐데!"(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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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때로 신앙은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증언되어야 할 때가 있다.
말 많은 신앙이, 침묵하시는 하나님보다 더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의 홍수’시대를 살아간다.

교회 안에도 말이 넘쳐난다.

예배 시간마다 반복되는 ‘할렐루야’, ‘주여 삼창’, ‘회개의 시간’이라는 말들 속에, 과연 실제 변화와 참회가 깃들어 있는가? 우리는 말로서만 은혜를 나누고, 말로서만 평화를 구하며, 말로서만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강단에서는 아름다운 설교가 선포되고, 찬양과 기도를 통해서도 아름다운 말들은 끝없이 흘러나온다. ‘사랑’, ‘은혜’, ‘회개’, ‘평화’, ‘소망’, ‘나눔’, ‘용서’ 등등의 아름다운 말들이 교회 안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그 수많은 말의 홍수 속에서 진실은 자주 실종된다. 오히려, 말 속에 숨어 있는 위선과 폭력은 사람들의 영혼을 짓누른다.


불의한 시대에 예언자는 침묵으로 말하고, 율법주의자는 입을 다물지 않는다.

그러나 예언자는 침묵함으로 하나님과 이어지고,
율법주의자는 말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된다.
동시에 예언자는 말함으로 하나님과 이어지고, 율법주의자는 침묵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된다.


회개를 촉구하는 말들이 넘친다.

하지만,

정작 회개해야 할 사람은 그 말을 하는 자들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경우 타자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자들은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회개할 기회조차도 없다.

많은 이들은 알고 짓는 죄가 알지 못하고 짓는 죄보다 무겁다고 생각하지만,

아니, 죄인 줄 알면 회개할 기회가 열려있지만,

죄인 줄 모르면 회개할 기회조차도 없다.

어떤 죄가 더 무서운가?


말은 복음의 수단이지만, 동시에 폭력이 되기도 한다.

욥기의 하나님은 말 많은 친구들 뒤에 숨어 계신다.

그들의 말을 듣고 또 들으며 침묵하고 계시다가 폭풍 속에서 침묵에 가까운 질문으로 응답하시는 것이다.


아름다운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실한 말은 삶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진실은 소리치지 않지만,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말보다 더 깊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욥은 이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정중하지 않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대담하며, 절박한 언어로 채워져 있다.

욥의 기도는 시편 기자들의 탄식처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신앙의 행위이다.

그것은 무례한 항의가 아니라, 부재 속 현존을 갈망하는 영혼의 마지막 신음이다.


"다만 두 가지는 주님이 저에게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서 제가 몸을 숨기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손을 제게서 멀리 떼시고,

제가 주님을 무서워하면서 겁먹지 않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13:20,21)


욥은 하나님과 논쟁할 자격을 달라고 요청한다.그리고 묻는다.


"왜 주님의 얼굴을 숨기시고,

저를 주님의 원수로 여기십니까?"(13:24)


욥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거나 숨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이 자신에게서 멀어졌음을 탄식한다.
이것은 믿음의 끝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진정한 기도는 신을 부정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분의 부재와 침묵 속에서 한탄하고 불평하기도 하지만,

신의 침묵 속 응답과 부재 속 현존을 믿으며 부르짖는 고백의 언어다.

욥은 이제 친구들의 신앙적인 위선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통과 무죄를 호소한다.


진실한 신앙은

하나님께 정중히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용기다.

때론 그 말이 불평처럼 들릴 수도 있고, 불온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직설적인 말들이 가장 진실한 말일 수도 있다.

고통이 엄습할 때 미사여구로 그 고통을 설명할 수 있을까?


욥은 친구들에게는 침묵을 요구하고, 하나님께는 응답을 요구한다.

이것은 불순한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응답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여전히 이어져 있다고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욥의 고통 속 항변은 믿음 없는 자의 소리가 아니라,

신앙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인 것이다.


절망의 끝에서 신을 향한 항변조차 멈춘다면,
그때야말로 관계는 단절된 것이다.

그러나 침묵 속에 침묵하지 않고 항변하는 자는 여전히 신과 이어져 있다.

욥의 항변은 불경이 아닌, 믿음의 불꽃을 지키려는 마지막 몸부림이다.


헨리 나우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하나님을 향한 질문은 신앙의 파괴가 아니라, 관계를 지속하려는 가장 정직한 형식”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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