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nalogu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수 Jan 16. 2016

소소한 기쁨이 큰 아픔을 이긴다

#28 김민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가을빛


신영복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접했다.

신영복 선생님은 1968년 '통일혁명당'사건에 연루되어 20년 20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셨다.

1988년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한 이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1990년 출간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붓글씨도 경지에 이르러 '신영복체'로 불리는 글씨는 서민의 아픔을 달래 주는 소주 '처음처럼'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글씨다.




신영복 선생은 지난 해 4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마 이(인터뷰를 담당했던 이진순 언론학 박사) 선생보다 더 속상할걸요, 속으로는.(웃음) 근데 엄청난 아픔이나 비극도 꼭 그만한 크기의 기쁨에 의해서만 극복되는 건 아니거든요. 작은 기쁨에 의해서도 충분히 견뎌져요. 사람의 정서라는 게 참 묘해서, 그렇게 살게 돼 있는 거지요.”


꽈리


'작은 기쁨'은 '소소한 기쁨'이다.

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역시도 '작은 풍경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작은 것, 소소한 것이 결코 의미 없지 않은 이유는, 절망이나 아픔이나 슬픔의 크기보다 비록 작아도 그로 인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사실, 사진을 하면서 많이 아팠다.

그토록 소소한 풍경을 담은 것들은 왜 그리도 아픈 것일까?

그래서 나는 소소한 풍경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내 글과 사진에 대한 변이다.


강원도 갑천 하대리 물골


사실은 뷰파인더로 들어와 담긴 모든 것들은 찰나의 순간이었으며, 내 눈을 고정시킨 것들은 그저 평범한 일상들이었다. 누구나 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했고, 내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은 또 다른 기록자들에 의해 남겨졌다.






일상이 아주 특별한 것이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것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그것을 듣는 귀가 달라질 때이다.

'깨달음의 순간', 그런 순간들이 중첩되면서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열리고, 눈과 귀가 열리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담론이나 큰 것에서 온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왔다.

그리하여 소소한 것, 작은 것이다.


민들레 씨앗에 맺힌 이슬



내가 가끔씩 작은 이슬방울에 심취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니멈의 세계를 보면서 '내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각인하는 것이다.





자연의 소소함을 담는 일은 어쩌면 신비스럽기도 해서 아름답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람, 삶의 문제로 다가오면 신비스러움은 여전하되 아름답다는 느낌보다는 아프다는 느낌이 더 많이 든다. 


다큐사진가들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다중노출
매향리에서


매향리에서


태백


제주 해녀 - 세화바다에서


강원도


다큐 사진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내게 다큐 사진은 일상에서 소외된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서 아프다.


감히 풍경이라 할 수 없는, 작품이라 할 수 없는, 거실 벽에 걸어두기에는 불편한, 돈도 안 되는....





그래서 내가 담는 사진들은 결국 '소소한 풍경'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위로를 얻고, 내 삶의 아픔을 이겨낼 근원을 찾아낸다.

신영복 선생님의  '소소한 기쁨이 큰 아픔을 이긴다'는 말씀처럼 말이다.


신영복 선생님, 그곳에서는 편히 쉬십시오.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골목길'엔 삶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