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김민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우리 주변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다.
시대적인 소임을 다하고 사라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있어야 함에도 떠나는 것들이 있다. 그 무엇이든 사라져가고 있는 것들은 애틋하다.
온갖 편리함의 노예가 된 우리의 삶 때문이다.
설 명절을 앞두고 어머니 산소에 갔다가 근처 아는 할머니 댁에 들렀다.
할머니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놓고는 잠시 마실을 나가셨다. 그 사이 물은 끓고 구들장은 따스하다.
사라지는 풍경들은 아스라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동시에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상징을 본다.
나도 누군가에게 추억이 될 수 있을까?
조금씩 변하면서 여전히 살아남는 것들도 있다.
우리들도 어쩌면 조금씩 변하면서 살아남은 것이다. 과학적인 용어로 '진화'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데 변화 혹은 진화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같아야 그 존재임을 증명한다.
털신은 털신 일 것, 인간은 인간일 것!
털신은 고무신이 아니고, 인간은 짐승이 아닐 것!
이제 어떤 세대에게는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이와 관련된 추억이란 하나도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지금도 서민의 겨울난방을 책임지는 귀한 것이다. 거의 사라질뻔한 위기에도 처했었지만, 살림살이가 어려운 이들이 늘어나면서 다시 회생한 것이 연탄이다.
살림살이가 퍽퍽해지는 서민이 많아질수록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었고 그들은 더 소수가 되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비극이다.
지금 내가 슬픈 것은
연탄으로 겨울을 나는 이들은 마음껏 탄 구멍도 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탄재를 보면 나는 그곳에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음을 감사한다.
더군다나 가지런하게 쌓인 연탄재, 게다가 완전히 연소되어 까만 구석이 없는 연탄재를 보면 연탄으로서의 소임을 다했구나 싶어 고맙다.
그러나 어찌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같은 것들만 사라지겠는가?
결국은 우리가 그 뒤안길로 쓸쓸하게 사라지는 것임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또 우리도 그렇게 서서히 뒤안길로 사라질 존재일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는 어르신을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존중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어르신(?)들이 있다면 그들은 비난을 받고 조롱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런 생활예술품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싶다.
반복의 패턴, 프레임마다의 차별성, 모든 소재는 자연으로부터 왔으며, 일상과 하나인 이런 것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획일적이지 않고 저마다 다르면서도 어우러져 본연의 역할을 다한다.
나는 요즘의 상품으로 만들어진 발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다들 획일적이고 한결같고, 기껏해야 자연을 모방한 것들 정도이다.
단 하나밖에 없지만 누구나 만들고자 한다면 만들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만들며 보내는 시간들을 자본의 사회에서는 비효율적이라고 가르친다. 결국,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맘몬으로부터 '비효율적'이라는 딱지를 받은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효율과 비효율이라는 것으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효율적이라거나 혹은 잉여라는 것이 누구에게 궁극적인 이익 인지도 생각해야 한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소비사회의 광고를 따라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더 많은 소중한 풍경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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