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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Feb 25. 2016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48 김민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한라산

길을 걷는 것과 인생은 닮았다.

그래서 인생은 나그네 길이요, 길의 끝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제시하는 종교는 모두 본질적으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죽음은 귀천이며, 죽음은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순례자는 무작정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걸으며 길을 찾는다.

갈림길에 서면 쉼의 시간을 갖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가늠한다.


어떤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길을 포기한다는 의미다.
사람은 누구나 포기한 길, 걸어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혹은 환상을 품고 산다.
지금 걷고 있는 길보다 더 나았을지 모른다는 환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제주도 절물휴양림


단테의 [신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의 절반을 지나가자 나는 어두운 숲 속에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길은 어긋난 길이었다."


어긋난 길임을 알았을 때에도 그 길을 계속 가야 하는 것일까?

많은 이들은 쉽게 '아니요!'라고 대답하지만, 익숙한 그 길을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은 적다.

익숙한 길을 벗어난 다는 것은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초당 가는 길 - 강진


그러나 두려움은 그것에만 몰입되어있지 않으며 동시에 매혹적이다.

그래서 익숙한 길, 그 길이 어긋난 길이 아닐지라도 미지의 길을 찾아 나서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길에는 '멈춤'이 없다.

그저 멈춰있고 싶어도 멈춰있는 순간만큼 우리는 그 어떤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앞 길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희미하다. 불확실하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한라산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오히려 우리에게 감사한 일이다.

미래를 알아버린다면 우리에게 오늘은 무의미한 날이기 때문이며, 미래에 저당 잡힌 오늘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오늘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내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것이다.
대관령 삼양목장


하루하루를 그냥 살아가지 말고 묻자.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너무 치열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지도 말자.

천천히 숨 가쁘지 않게 걸어가야만 길 위에 펼쳐진 수많은 풍경들을 깊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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