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은 못 생겼다. 한 때는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나름 예쁜 손이다.
손이 고운 사람을 보면 ' 참 예쁘다' 싶다가도 이내 시기심이 든다.
'고생을 안 해본 손이구만?'하면서 못 생긴 내 손을 토닥거리며 위로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아가들은 어릴 적 어머니의 손길을 가장 많이 타고, 식구들의 그 많은 손 중에서도 어머니의 손을 가장 많이 보며 자랐을 것이다. 살아계신 아버지의 손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 느낌까지도.
내 손은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의 손은 한 시도 일을 손에서 놓으신 적이 없었으므로 거칠었고, 마디마다 주름이 깊었으며, 손바닥은 거칠어서 등이 간지러울 적에 어머니 손바닥이 '쓰윽!' 지나가면 시원할 정도였다. 농사일을 하셨으므로 손톱에는 늘 풀물이 들었고, 갈라진 손바닥 사이에 물든 풀물은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이나 어머니 손바닥이나 다르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 난, 여자의 손이란 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어머니 또래의 여인들의 손이 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고와서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저런 손을 잡고 나들이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운 손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옆집에 살던 누님의 곱고 아름다운 손을 잡고 나들이를 갈 때에(누님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많았지만, 그 당시 그녀는 20대였다.) 손바닥에서 땀이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 손도 다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낫으로 대나무를 깎아 연을 만들고, 토끼 먹이를 베러 산야로 돌아다니고, 겨울이면 손이 다 터져서 갈라지곤 했으니 손이 고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토끼 먹일 풀을 베다가 풀 속에 있던 깨어진 사기그릇에 낫이 튀면서 왼쪽 손가락 세 개를 뼈가 다 보일 정도로 베이기도 했었다. 수술을 하지도 않고 그냥 붕대만 칭칭 감아두었었는데도 상처만 희미하게 남았으며, 손가락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이 재미있어서 힘닿는 대로 도운 결과 내 손마디에는 주름이 많고, 손톱도 진화해서 친구들에 비해서 많이 컸다. 대체로 친구들의 엄지발톱 정도의 크기였다.
그래도 나름 내 손이 뿌듯했고, 어머니의 손이 고마웠으며, 아버지의 거친 손 역시도 고마웠다.
그 손이 있었기에 살아올 수 있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손을 많이 써서 그런지 손으로 이것저것 만드는 일들을 잘 했다.
글씨도 못 쓴다는 소리를 들어보진 못했고, 손재주가 있다는 소리는 자주 들었고, 손으로 만드는 것들은 대충 눈대중으로도 잘 만들고, 심지어는 사무실에서 우편물을 붙이는 봉투작업을 해도 남들보다 손놀림이 월등하게 빨랐다. 그래서 나는 못 생긴 내 손이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단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다. 손에 대한 자부심이다.
한동안 내 손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었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것이 손의 일인 줄 몰랐고, 손으로 흙을 만지며 마음으로 느끼면서도 그것이 손의 일인 줄 몰랐다. 간혹은 내가 하는 일 때문에 기타를 치면서도 그것이 손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하루의 삶을 연명할 수 있는 밥을 먹는 일조차도 손의 일인 줄 까맣게 망각하고 살았다.
지금 이렇게 자판을 치고 있는 것도 손의 일이며, 이 글을 쓰기 전 공책에 떠오르는 단상들을 메모했던 것도 손의 일이다.
내 손은 못 생겼다.
그래도 나는 내 손이 좋다.
다행스러운 일은 우리 아이들은 아내의 손을 닮았다는 것이다. 아들이고 딸이고 나름 손들이 곱고 예쁘다.
삶의 이력은 발에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손에도 새겨진다. 아니, 우리 몸 구석구석 삶의 흔적이 새겨지지 않은 곳은 없다.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할 뿐이다. 그래도 악수를 나누며 손에 구덕 살이 베긴 이들을 보면 왠지 정이 더 많이 간다. 어쩔 수 없는 편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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