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앉아 쉬던 그 의자에 앉은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제주도 동쪽 끝 마을 '종달리 해안도로'를 따라 하도 방향으로 가다 보면 고망난돌이라는 언덕이 있다.
그곳에 서 동쪽 바다를 바라보면 소를 닮은 섬 우도가 한 눈에 들어오고, 서쪽을 바라보면 백록담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는 하도 바다가 보이고, 하도와 우도 사이로는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선명하게 펼쳐진다.
2004년 11월,
바람은 제법 차가웠지만 고망난돌에는 지난 보랏빛 갯쑥부쟁이와 해국이 한창이었다.
그곳은 갯쑥부쟁이와 해국뿐만 아니라 노란 감국, 털머위, 갯씀바귀 등 야생화 천국이기도 했다.
야생화에 취미를 붙이기 전에는 갯바위에서 낚시도 많이 했다.
종달리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들락거렸던 곳이 고망난돌이었으며, 그곳 전망 좋은 곳에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대체로 내가 찾는 시간은 인적이 드문 시간이었기에 대체로 빈 의자였으며, 설령 사람들이 그곳을 찾더라도 오랫동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기에 그 의자의 주인은 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곳에 앉아 책도 보고, 글도 쓰고, 바다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물질하는 해녀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어떤 날은 돌고래의 유영을 보기도 했으며, 하루를 열어가는 장엄한 붉은빛의 바다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날은 누군가 그곳을 찾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앉아있었던 그녀, 12년이라고 하는 세월 동안 어떻게 변했을지, 혹시 이 사진을 보면 그, 당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해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기꺼이 나의 의자를 양보해 줄 수밖에 없는 느낌으로 그곳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노란 자전거를 타고 온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일주하는 중이었을까?
낯선 이에게 말을 걸어도 쑥스럽지 않을 나이었지만, 괜스레 사색하는 그녀가 민망해할까 싶어 먼발치에서 바라보다 지미봉 뒤편으로 있는 돌담밭을 한 바퀴 돌고 난 뒤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왔다.
한 시간 여는 훌쩍 지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앉아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물었다.
"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난 꽃 이름을 아세요?"
"해국이라고 해요."
"동네분은 아니신가 봐요. 말씨가...."
"예, 서울에서 왔어요. 이제 4년 되었어요."
"제주도가 좋으세요?"
나는 좋다고 선뜻 말할 수 없었다. 삶의 터전에는 낭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어디나 그렇듯 좋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해요. 잠시 살다가는 것은 좋을지 모르지요."
"저것도 해국인가요?"
"아니요, 저건 갯쑥부쟁이라고 해요."
"꽃은 비슷하게 생겼는데 이름이 다르네요."
"예, 아주 작은 차이 때문에 이름이 달라지지요."
"그러네요. 아주 작은 차이 때문에 삶도 달라지지요."
여기까지였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때는 그냥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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