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는 민들레를 보며 세월호 2주기를 맞이하는 나를 돌아본다.
민들레가 피어나는 봄이다.
콘크리트 숲 도시의 작은 틈에서 피어나는 꽃들이 제법 많다. 지난 한 주간 동안 도심을 걷다 척박한 도심에서 피어난 작은 풀꽃들을 헤아려본다.
보랏빛 제비꽃, 하얀 쇠별꽃, 파란 개불알풀꽃, 줄무늬 산자고,
노란 꽃다지, 하얀 냉이, 노란 민들레....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는 생명을 보면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경외감을 느낀다.
어느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그러나 그런 일상들이 흔해지면, 그러려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때론 불편 해하기 까지 한다.
가뭄이 심하던 어느 여름날, 전주 한옥마을을 걸었다.
어느 고택의 담벼락에 민들레가 피었다가 가뭄에 말라죽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다시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주 극심한 가뭄이었던 것이다.
민들레는 구덕초라고 한다.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아홉 가지 덕을 가지고 있어서 구덕초인데, 그중 하나가 '모진 환경'을 이겨내며 피어나는 덕이다. 생명의 끈질김이겠다.
그러나 나는 그날 보았다.
아무리 민들레라고 할지라도 견딜 수 없는 타는 목마름에는 결국 타버리고 마는 것이구나.
마시던 생수를 부어주었지만, 아마도 그 민들레는 그렇게 말라죽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아파하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너무 쉽게 "잘 될 거야!"라고 말하거나 위로의 말을 하는 것도 큰 폭력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넌 잘할 거야!"하는 응원이 아니라,
물 한 모금이었던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그 날 그 어린 생명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은 국민이 있었을까?
나 역시도 그날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그리고 2주기를 앞둔 2016년 4월, 무엇 하나 진상규명이 밝혀진 것도 없지만, 이 사회는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유족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사회가 얼마나 커다란 폭력의 사회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애도하는 것도, 유가족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자 하는 것도, 노란 리본도 소위 '빨갱이' 취급을 받는 세상이다.
심지어 그들을 향해 '우상'이라고 매도하는 이도 있다.
나는 이런 무시무시한 폭력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때론 두렵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불편해 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는 손가락질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우상이라 하고, 마치 그들이 무슨 국가전복 세력이라도 되는 냥 매도했다.
도대체 무엇이 불편한 것인가?
민들레 피어나는 봄날, 나는 몇 해전 만난 전주의 돌담에서 죽어가던 민들레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레 세월호 참사로 죽어간 이들과 지금도 광화문 광장에서 피눈물로 진상규명을 위해 애쓰는 유족과 그들 곁에 있는 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조차도 불온시하도록 이 사회의 권력은 국민을 세뇌시켰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폭력 사회인 것이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물이다.
목말라죽어가는 민들레에게 "잘 살아야 해!"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옳은 말은 아니다. 그 말이 정말 옳은 말이 되려면 그들에게 물을 주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올해 4월 16일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두렵다. 제삼자의 트라우마가 이런데 유족들은 얼마나 아플까?
나는 늘 그랬듯이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곁에 있어 주고, 몇몇 기록을 남기는 것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위로의 말 조차도 너무 쉽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폭력적인 언어를 자행하는 이들이 백주대낮에 활개를 치는 이들을 방치할 뿐만 아니라, 그들 뒤에 숨어서 이득을 보는 이들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곁에 있고자 하는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불온세력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그들은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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