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적으로 우리들이 성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기준이 다를수도있겠지만 보편적으로 알려진분들을 열거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싯다르타 예수 공자 그리고 이견은 있지만 무함마드.
각자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 성인들은 인류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인터넷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에 깊은사유와 사상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이 경도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싯다르타는 불교, 공자는 유교, 예수는 그리스도교, 그리고 무함마드는 이슬람교.
이 분들의 일생에 대해 정확한 사실로만 알려진것들은 많지않습니다만,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것은 이 4명의 성인들에게 있었던 일종의 결핍과 고통에 대한것들입니다.
석가와 공자는 엇비슷한시대를 살아간 인물입니다. 두 성인이 서로를 알았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인류사의 거인 둘이 거의 동시대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롭습니다. 먼저 싯다르타는 유복한집안에서 부족함없이 살았던것으로 많이들 알고 계시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던것 같습니다. 고타마싯다르타는 자신의 출생과 동시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애를 낳다 사망하는것이 놀랍지 않던 시대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고타마라는 비범한 인물이 그렇게 태어났다는 점은 약간의 의미를 부여하게 만듭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인도의 율법에 따라 이모를 새엄마라 여기며 자랐다고하는데, 고타마는 자신의 출생이 곧 친어머니의 죽음을 불러왔다는 사실에대해 어떤 생각을 했었을지 그저 궁금합니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죠. 그중에서도 어머님이라는 존재는 아이에게 신과 다름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나 신이 가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어냈다'
저는 결혼도 경험해보지못했고 아이를 낳은 경험은 더더욱 없지만, 어머니의 사랑이라는것이 어떠한것인지는 저 역시도 느끼며살았기에 어느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태생부터 비범했을 싯다르타에게 친어머니의 죽음과 부재는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그저 새가 벌레를 쪼아먹는 일상적인 장면을 보고 자연에도 생과사가 존재한다며 큰 충격을 받았다던 영특한 아이는 친어머니의 부재를 얼마나 남다르게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역시도 모든것을 누려본것처럼 보여지지만, 어떠한 결핍이 존재했을것이라 감히 생각해봅니다.
공자의 경우도 출생 과정이 일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공자의 아버지는 노나라의 하급공무원이었는데 손이 귀했습니다. 혼란한 시대에 아들을 보고 싶었던 공자의 아버지는 나이 70살에 16살의 처녀를 아내로맞아 공자를 낳게됩니다.
그리고 공자의 나이 3살에 아버지는 사망하게되고 20대초반에는 어머니마저 여의게 되죠. 공자 역시 역사에 남을 비범한 통찰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사유의 힘을 알고있던 위인이고 인의를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공자는 인생 초년기에는 부모를 잃었고 인생 말년에는 제자를 잃게되죠. 공자가 자로라는 제자를 잃었을때의 이야기는 많은분들이 알고있을 야사로 남아있습니다.
공자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 젓갈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전쟁터에서 죽게된 공자의 제자 자로는 피부가 벗겨져 젓갈로 담가졌는데, 그 소식을 들은 공자는 통곡을 하였고 그 이후로는 젓갈관련 음식을 평생 손에도 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공자의 인생에서도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없는 고통과 번뇌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먹먹합니다.
예수는 너무나도 유명한 출생비화가있죠. 그것이 신화적인 이야기이든 비유적인 의미이든, 그 역시 어찌되었든 아버지의 부재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사람들도 처녀의 잉태는 그다지 좋은일로 바라보지않았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예수가 이후에 사람들에게 미친 수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기 그 이전, 그가 출생해서 청년기에 접어들때까지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됩니다. 바르지못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를 돌로 때려죽이는 시대를 살아낸 예수의 인생에서 고통과 핍박, 그리고 번뇌가 얼마나 그를 괴롭혔을지 헤아리기 힘듭니다.
무함마드. 그 역시 부자인 집안에서 태어는났지만 그에게 부여된 인생이란 존재가 항상 안락한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전에 죽었고 그의 유년기를 다 거치기도전에 어머니 역시 사망합니다. 무함마드의 인생초반기는 경제적으로는 어느정도 유복했을지언정, 사랑이 가득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상인이던 숙부에게 맡겨진 그는 사막을 횡단하며 고단한 시절을 보내야했습니다.
성인이라고 불리던 이들도 인생의 고통과 결핍, 그리고 번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어떠한 것을 느껴야 할지는 사람마다 다를것입니다. 저 양반들도 별수없는 사람이었네라고 느낄수도 있고 저러한 고통과 번민을 결국 초월하였으니 후대에 성인으로 남은것이라 생각할수도 있겠습니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반드시 스스로의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한다'
니체라는 철학자가 남긴 이 한마디를 저는 아주 좋아합니다. 제가 고통스러운 순간을 마주했을때, 걱정에빠져 허우적거릴 때마다
어쨌든 좀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겪은 고통과 번민은 제 인생의 전체 길에서 일종의 이정표로 남을것이고, 그 이정표는 행복으로 향하는 나침반으로 작용할것이란 소소한 기대를 품게합니다. 자기합리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습니다. 내 인생에서 생긴 굴곡과 텅빈공간은 결국 내가 펴내야하고 채워내야하는 업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 인생을 관조할 때, 성인들도 피해가지못한 고통과 결핍과 번민은 결국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움츠림이라고 생각하고싶습니다.
인생의 고통과 결핍을 통해 성인으로 거듭난 위인들처럼 될 필요는 없다고생각합니다. 우리는 남들과의 비교로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우리가 비교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입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를 좀 더 성장하게 만드는것이 고통과 결핍이라면, 조금 너그럽게 생각해도 좋을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comedy) 가까이서보면 비극(tragedy)이라지만, comedy에도 슬픈장면은 있는법이고 Tragedy에도 웃을 수 있는 장면은 있는법입니다.희극과 비극은 모순적이지만,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글이 손톱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지만,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는것은 생각보다 쉽지않은일입니다. 다만 저도 그렇고 이 글을 읽는분들도 그렇고 고통과 절망이 나의 모든것을 집어삼킬것이라는 생각에서 한발짝만 멀어져보자 다짐하게 된다면 저는 이글의 쓰임이 과분하다고 생각하려고합니다.
오늘의 고통과 절망은 내일의 희망과 행복을 담보합니다. 그렇게 믿고사는 삶을 살겠노라고 이런글을 썼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일의 희망에 기대를 걸어보는 오늘을 살아가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