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기억

인생에 아련한 기억 한두개쯤은 꽤 괜찮지 않나요

by 강다로

저 어릴때, 초딩때는 그야말로 만화영화의 전성시대였습니다. 포켓몬스터부터해서 k캅스, 다간, 세일러문, 웨딩피치, 태양의전사피코, 쥬라기월드컵, 천사소녀네티, 꾸러기수비대, 은하철도999 등등... 적어도 제가 13살때까지 본 수많은 만화들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그시절 남학생들의 첫사랑은 세일러문이나 웨딩피치, 혹은 천사소녀 네티속 등장하는 히로인들이었고 여학생들에게는 셜록스나 그에 대응되는 남자주인공들이 그 대상이었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어린시절에 은하철도를 보면서 정말 몰입했던 기억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은하철도999는 10살 근처애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어둡고 무거운 내용이었던것 같습니다. 몸을 기계로 바꿔서 영생을 살아간다는 목표,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자하는 철이의 집념과 그 옆에서 철이를 보살피는 메텔의 존재는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것이었습니다만 그럼에도 한화 한화에 굉장히 집중했었네요. 아직도 철이와 헤어지는 메텔의 마지막장면이 또렷한데, 그때의 착잡함은 제가 20살이 넘어 나중에 메텔과 철이가 다시 만난다는 인터넷커뮤속 글을보고서야 비로소 해소되었습니다.


꾸러기수비대 이야기를 안할수가 없네요. 저는 용캐릭터를 가장 좋아했는데 왜 쥐가 주인공이고 가장 많이 출전하는지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쥐보다 강한 동물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굳이 작품 속 최강자라인으로 표현되는 용이나 호랑이, 소가 아니더라도 왜 자그마한 쥐가 항상 주인공인지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일종의 파워밸런스를 고려한 설정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저와 비슷한세대의 학생들에게 12간지가 무엇인지 아주 정확하게 각인시켜준 작품이기도 하고, 우리가 흔히아는 동화속 이야기를 비틀었다는점이 아주 참신했더랬죠.


세일러문과 웨딩피치. 사실 저는 세일러문은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왜 안봤는지 기억은 잘 안나는데 오프닝곡 나올때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서였는지...잘 모르겠네요. 세일러문은 제 기억으로 국내에서 여러번 더 방영을 한것으로 아는데 저는 세일러문에 대해 잘 모릅니다. 대신 웨딩피치는 재밌게봤는데 아마 단시간에 몰입할 수 있는 히로인 숫자..가 크지않았나 싶네요. 세일러문 속 히로인들은 종류가 많고 저같은경우는 그런걸 구분해내지 못하다보니 뭔가 압축된 히로인들로 딱 4명 5명으로 구성된 웨딩피치를 더 재밌게 본거같습니다. 오히려 여학생들이 세일러문을 더 좋아했던거 같은데, 덕질할 요소가 더 많아서 그렇지않았나 짐작하게되네요.




그리고 천사소녀네티... 저는 이 만화를 처음 보았을 때, 작품배경이 되는 도시가 실재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차분한 소도시에서 새카만 밤하늘과 대비되는 거리의 가로등. 그냥 배경화면일 뿐인데 주인공이 달리고 날아가는 배경의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만화가 끝나면 저녁7시근처였는데 만화가 끝난 여운을 못이기고 밖에 나와 저녁거리를 무상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나네요. 만화를 보고 너무 몰입하다보니 저는 오히려 네티 한화 한화가 끝날때마다 참 슬펐습니다. 사건이 해결되고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네티의 미소와 그 뒤로 펼쳐져있는 아득한 밤하늘, 그리고 보석처럼빛나는 별들이 뒤로 지나가며 만화는 끝나잖아요.


사람은 너무 아름답고 너무 이상적인것을 보면 오히려 슬퍼진다는 이야기를 들은게 기억납니다. 나는 결국 그곳으로 갈수도없고 그 존재나 동료가 될수없기때문에 그렇다고요. 적어도 저의 초딩시절 네티가 사는 불빛과 별빛이 아름다운 동네나, 포켓몬스터 속 존재하는 형형색색의 마을들은 기쁨이면서도 슬픔이었던것 같습니다. 항상 크레파스색감을 가진 영상속 배경들은 눈에는 담을 수 있을지언정 내가 갈 수 없는곳이라는 생각때문에 만화를 재밌게보고도 약간 울적했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그런 울적함만 가지고 십대초반을 지나고 사춘기를 지나보낸건 아니죠.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어릴때보던 만화들은 점점 마음 저 깊은곳에 자리하게 됩니다. 기억이 옅어지면 감정도 희미해지죠. 중학교 고등학교시절엔 또 그 나름의 재미를 느끼며 그 시기를 거쳤습니다. 특히 중학교때는 책을 정말 많이 읽었었네요.




그러다가 군에 입대하고 처음 맞은 성탄절. 진짜 소나무로 트리를 만들어본건 그때가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삭막한 군부대와 크리스마스트리는 어울리지 않을것 같지만서도 전구까지 크기별로 달아놓으니 제법 그럴듯하더군요. 근데 이등병이던 저에게는 그 자체가 큰 감상으로 다가오진 못했습니다. 나는 내년 성탄절에도 이곳에 있어야하는구나...오히려 현상황에 대한 허탈감만 가졌던거같네요

아무튼 저녁근무를 마치고 빨빨대면서 선임들 뒤치다꺼리를 하는와중에 누가 내무실 불을 갑자기 꺼버렸습니다. 아마 제가 불끄라는얘길 못듣고 있던걸 대신 듣고 끈거같은데... 순식간에 어두워진 내무실에서 선임하나가 트리 전구 스위치를 켜더군요. 그리고 당시 내무실에 존재하던 낡은전축인지 뭔지 그게 달칵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저는 그게 작동하는건 줄 그때 처음알았죠. 놀랍게도 그 낡은전축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천사소녀네티의 메인테마곡이었습니다.


https://youtu.be/3iBYZ_BrJWg?si=LKRkcEMcBNxrET8Z


음악이 가지는 힘은 대단합니다. 귀로들어올뿐인 선율만으로 과거의 어떤 경험과 잊었던 기억, 감각과 감정을 모두 그때 그 시절로 돌려놓으니까요. 끽해야 저보다 두세살 많았던 선임들도 저와 비슷한 세대였다는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네티테마곡이 흘러나오는동안 내무실 선임중에 말을꺼내는 사람은 없었어요. 어두컴컴한 생활관안에서 빛나는 트리위의 전구들이 어린시절 꿈꾸던 만화속 밤하늘의 별과 겹쳐보였습니다. 선율이 흐르는 약3분여의 시간동안 어떤 감상에 빠진건 이등병인 저뿐만이 아니었을겁니다. 무언가 잊었던 감성이 풍부하게 올라오면서 마음속깊은곳을 찌르르하게 만드는 존재. 혈기왕성한 남자들만 모인 군대안에서 그토록 아련한감정을 느끼는것도 흔한 경험은 아니겠죠. 수증기가 새는 라디에이터의 불규칙적인 소음도 그 시간만큼은 아름다운 선율이 감춰버렸습니다.


방한이 제대로 안되어 문가나 창가에서 이따금씩 올라오는 한기가 꼭 과거의 기분을 환기시켜주는것 같았습니다. 3분여의 조용한 시간동안 아주 오랜만에 옛날생각을 하며 서있었네요. 그날 서늘하던 문가의 손잡이,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던 말년의 무표정한얼굴, 바닥에서 올라오는 구두약냄새, 선율이 흐르는동안 가만히 트리를 바라보던 맘씨좋던 선임, 음악이 끝나고 이제 불켜라라는 소리까지...불이 다시 켜지면서 저는 순식간에 짬 제일낮은 이등병의 초라한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짧았던 추억여행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어떤 선임의 '노래참좋다'라는 간소한 후기 그 한마디가 참 좋았네요. 사실 제가 이등병 일병때 부대내에 사건사고가 꽤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저는 그날 이후 군생활이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던거 같습니다.


요즘도 가끔 이 음악을 어딘가 골목길에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듣게되는 날에는, 제가 이등병이던시절로 갔다가 종내에는 초등학교시절까지 돌아가게됩니다. 추억은 아련함이라는 단어와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요. 아마도 다들 저같이 사소하면서도 깊게 남아있는 몽글한 기분, 이지(理智)만으로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 하나쯤은 있으실겁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저는 이 노래와 그때의 분위기가 생각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정우성 혼외자기사를 보고드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