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운명이란 있을까
수년전 돌아가신 제 조부께서는 명리학을 꽤나 오래 공부하셨었습니다. 이름이나 표지도 안보이던, 한자로만 가득 찬 책들이 골방에 무수히 많았는데 사실 그게 정확히 무슨 책이었는지는 지금도 저는 모릅니다.
조부님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남은 서적들과 족보집들을 쭉 들여다봤는데 어릴때보았던 그 명리학 서적들은 이제 글자도 희미하게 보일정도로 다 닳아있었고 집안 어르신들이 그런책들은 모두 정리를 해버리셨으니 제가 그 책들에 대해 명확히 알기란 이제 요원해진 일인것이죠.
어린시절엔 돋보기까지 들고 골똘하던 조부께 책들이 신기해서 물어본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이걸 공부하면 사람의 운명을 다 내다볼 수 있냐고 말이죠. 제 물음에 너무나 명료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런걸로 사람 운대가 다 보이면 사람 인생이 얼마나 쉽고 또 허망하겠느냐. 당장 내일이 어떨지도 모른다'
그럼 사람들은 왜 사주니 팔자니 그런걸 보는거냐는 제 질문에 조부께서 헛웃음을 지으면서 하신 말씀이 그렇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 아니겠느냐?'
혹시나라.. 어릴땐 이해 못했던 말인데 나이들고서는 조금 이해가 되는면이 있네요. 저도 매주 로또를 사지만 당첨을 믿는다기 보다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명막도어오행(命莫逃於五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운명은 오행(사주)로부터 도망칠수없다' 라는 뜻입니다.
들어보신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주명리에서 자주 쓰이죠. 동양의 옛사람들은 운명은 오행(사주)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라고 믿었습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부여되는 여덟글자로 우주 삼라만상의 톱니바퀴에 끼인 인간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갇히고 만것이죠.
사주가 안좋게 태어난 사람은 그럼 평생 안좋게 살아야하는건가?
이 의문에도 조부께서 답해주신말씀이 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가뭄이 심해 이번해 농사가 어려울것이란 예측만으로 농사꾼들이 농사를 포기하는걸 본적있느냐. 가뭄에는 가뭄에 대비하면서 농사를 짓는거지. 오히려 가뭄에 철저히 대비하면서 농사를 짓다보면 뜬금없는 수확이 생길수도있는것 아니겠느냐. 그런것들이 또 인생의 묘미가 되는것이고'
그 시절 기억하나가 있는데 당시 시골에서 조부님이 나름 사주를 좀 잘본다는 소문이 돌았던지, 내담을 원하는 분들이 많으셨습니다. 그 중에 정계에 발을 들이는 것을 고민중이던 분께서 찾아오셨던 것이 바로 그 기억 한조각입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노신사셨죠.
이미 재산으로 일가를 이뤘고 지역유지로 더 가질게 없어보이던 그 분은 아마도 더 큰 명예를 갈망했던것 같습니다.
그분과 조부께서 무슨말씀을 나누셨는지는 사실 기억이 안납니다. 아마 재미없는 얘기였을겁니다.
근데 순수하게 궁금한점 하나가 저에게 있었습니다. 이미 이룰거 다 이룬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뭐하러 굳이 사주를 보러오는걸까.
'돈도 있을만큼있고, 인맥도 충분하고 모든것이 다 갖춰진 사람이 가장 원하는게 뭐일것 같으냐. 나름대로 인생철학을 가지고 크게 성공한 사람도 함부로 재단못하는것이 바로 시기와 운이다. 저런양반들은 그 시운마저 자기 손아귀에 놓고싶어하는것이지'
그땐 이해못했던 말들이 머리가 굵어지고나니 조금씩 이해가되는부분들이 있습니다.
조부께서는 명리학을 오래 공부하셨지만 그것이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진 않으셨던것 같습니다.
'사람은 평생을 살아갈 때 내 주관과 지식과 경험으로 움직이되, 무언가 거리낌이 있으면 이런저런 도움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할때가 있다. 그 여러 도움 중 명리학이 아주 작은 참고가 될 수 있는것이다. 사주명리를 인생의 기준으로 두고 움직이는것이 아니라 인생이 덜컹일때, 여러 곁가지 방책 중 하나로 사주 한두번정도 보는것. 그뿐인것이지 그것이 주가 되어서는 안된다'
몇번씩 방문하시던 상담자와 내담자의 심도깊은 대화가 오고가는걸 어렸던 제가 다 이해할수도 없었고 기억도 거의 나지 않습니다.
다만 항상 찾아오는 분들께는 말미에 저렇게 말씀하셨던것은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