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I. 깨닫는다는 것 9. 끌레샤 Klesha 번뇌


지금 우리는 몇 차레에 걸쳐 그들이 추구하는 '깨달음'이라는 세계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중입니다. 이 세계관이 나오던 고대 초기에는 물질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 어떤 궁극을 깨달으려 했던 것, 모든 정신을 하나로 모아 유리같이 고요한 상태에 도달하려던 것을, 그 수행자들이 추구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다가 세상일이 무가치한 게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깨달음의 전제 조건인 세상을 버리고 떠나는 것 외에도 세상 안에서도 일념으로 집중하면 궁극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세계관이 커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세상 안에서는 어떤 태도가 조건적으로 필요한 걸까요?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설사 사회 밖으로 나가지 않고 세상일 하면서 살지만,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크게 경계했지요. 그들은 그 집착의 뿌리를 끌레샤klesha라 했는데, 이를 한자어로 번역하여 ‘번뇌’라 부릅니다. 주로 마음을 괴롭히고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번잡함을 의미하지만, 사실은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물질 관계에 대한 집착을 의미하지요. 불교에서는 이것이 인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 보는데, 믿음이나 사랑이나 소망이나 그 무엇이든지 과할 때 생기는 걸 의미하는데, 크게 보아 탐진치, 삼독(三毒)이라고 부릅니다. 탐(貪), 분노(瞋), 어리석음(癡) 세 가지입니다.


탐은 설사 그것이 사랑이나 소망이나 믿음과 같이 바람직한 것일지라도 그 정도가 과해 집착 단계로 가면 독이라는 거지요. 누군가 사랑은 낭비하는 것이라고 말하던데, 이걸 불교에서는 탐으로 보는 거지요. 자식을 애착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채 키우니 이 사회에 그 ‘금쪽이’가 그렇게나 많다고도 보지만, 달리 보면, 애착이 과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보는 거지요.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바른 삶의 이정표 노릇을 한 ‘무소유’라고 하는 개념 또한 이 맥락에서 주목받는 세계관입니다. 고대 초기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삶을 표방했고, 그게 도가 지나쳐 일부에서는 나체로 살아야 한다는 종교까지 나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근본의 의미를 살려, 재산의 사회적 환원이 큰 미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인도의 기업 따따(Tata) 그룹 창업자가 행한 부의 사회적 환원이나 어른 김장하 선생이 행한 ‘줬으면 그만이지’와 같은 삶을 따르자는 것이 되겠지요.


현대 사회 특히 정치가 과할 정도로 집중을 받는 한국 사회에서는 탐도 탐이지만, 진(瞋)에 대한 경계가 더 많이 마음에 닿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에 대한 미움, 그것이 커져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분노, 나중에는 정신에 병이 될 정도로, 그렇지만, 본인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믿는 적개심이 바로 이 진에 해당합니다. ‘자기 혼자 살려고,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까지, 나라를 이렇게나 망가뜨려야 하겠는가, 이런 자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메시지를 A 정당과 B 정당의 지지자에게 보여주면 A 정당 지지자들은 그 사람이 B 정당의 대선후보라 말하고, B 정당의 지지자들은 그를 A 정당의 대선후보라 말할 것입니다. 그 적개심이 얼마나 사람을 망가뜨리고, 사회에 악으로 퍼져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꼭 한국에서만의, 혹은 정치에서만의 일일까요? 이게 인간에게는 누구나 있는 피할 수 없는 본능 같은 것 아닐까, 라고 고대 인도 사람들은 생각했다는 겁니다. 꼭 세상일에 몰두해서 사는 사람만의 일도 아니고, 심지어는 세상 모든 일, 다 버리고 사회 밖으로 나가 수행하는 사람에게도 해당한다는 것으로 보았다는 거지요.


세 번째 것은 치(癡), 어리석음입니다. 이치를 아는 혹은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혹은 더 나아가 진리를 아는 것을 ‘비디야’vidya라고 하는데, 보통 명(明)이라 번역하지요. 그게 없는 걸 무명(無明)이라 부르는 것과 관계 있는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도화녀와 비형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화녀는 진평왕 때의 뛰어난 미녀로, 화랑이나 귀족 남자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답니다. 그는 자신의 미모를 앞세워 숱한 남자들을 홀려 욕망을 채우며 살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사람이 비형랑(鼻荊郞)이라는 인간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이상한 존재의 아들을 갖는데, 그는 너무나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라서 왕을 경호하는 일을 맡으면서 순간이동을 하거나 모습을 감추는 등으로 세상에서 큰 출세를 하지만, 끝까지 인간 사회에 완전히 섞이지 못하고, 귀신 같은 존재로 외롭게 남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의 탐과 그 자신의 진과 치로 인해 생긴 까르마 결과로 보는 거지요. 어디서 많이 보는 모습 아닙니까? 7세 의대 준비반, 성형 중독 선풍기 아줌마라는 분, 검사 출신 대통령의 착각과 내란...세상 이치를 그렇게나 모를까, 탄식하게 만드는 이런 모습 말입니다.


번뇌라는 게 삶의 본질로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고대 인도인들은 보았습니다. 다른 여러 곳에서, 말씀드렸듯이, 세상 삶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시각이지요. 그렇지만, 세상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시각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지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라고 기독교인들이 노래한다면,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모두 지나치면, 독이니라, 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의 가르침이 왜 이렇게 강하게 이 사회에 남았을까요? 그 사회가 탐진치가 너무 심해서였을까요? 탐진치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많아서였을까요? 그들은 삶을 번뇌라 봤으니, 그 번뇌로부터 초연해 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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