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III. 붓다, 세상을 버리고 떠나다. 9. 염화시중 拈花示衆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순 우리 말’이라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꽤 널리 쓰였습니다. 특히 한자로 만든 용어에 대해 그런 태도를 많이 가졌는데,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고, 일본에서 만든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경우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요. 예컨대, ‘수순’이라는 말은 될 수 있으면 쓰지 말고, ‘순 우리 말’인 ‘차례’라는 어휘를 쓰라는 거지요. 사람들은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에 대해 매우 심한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어에서 온 ‘리어카’라는 말은 버젓이 외래어로 쓰면서 일본어에서 온 ‘구루마’라는 외래어는 쓰지 말라는 거지요.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엄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자는 중국에서 나왔지만, 중국, 한국, 일본은 모두 그 한자어를 사용하고 있기에 세 나라 모두 그것으로 어떤 용어를 만들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중국만 갖는 게 아니지요. 일본이 자기 방식의 한자 용어를 만드는 것도 옳고,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한자로 쓰는 용어는 ‘순’ 우리 말이고, 새로운 개념의 용어를 만들 수 있는 자격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겁니다.
불교의 개념화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도에서 나온 개념을 중국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시 한국과 일본에서 받아들였으니, 그 개념을 그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거나 창작하여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지요. 더군다나 불교는 기독교와는 달리 바이블이라고 하는 정경(正經 canon)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그 밖의 것은, 이단으로 치는 종류의 분별을 하지 않는 종교이기에 그렇습니다. 중국 번역 불교의 여러 개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게 염화시중 (拈華示衆)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붓다가 옛날 영취산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하는 자리, 즉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 한 송이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니, 대중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제자 가운데 오직 마하가섭(Mahakashyapa)만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답니다.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붓다의 가르침은 말로 해서 이해하는 건 아니다, 라는 것과 또 하나는 마하가섭만이 제대로 이해했다는 거지요.
붓다의 가르침은 논리나 설명을 통한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가르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거지요. 인도의 초기 경전에는 이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염화시중’의 이야기가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방편 가운데 특별히 선(禪)이라는 방편을 중시하는 중국에서의 선종에서 만든 이야기일 뿐이지요. 팔정도를 자세히 보면 붓다는 선과 교(敎)를 함께 중시합니다. 논리적 이해나 가르침은 버리고 오로지 그 너머의 직관만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경전에서는 법을 비(非)언어적 혹은 체험적 혹은 직관적으로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 염화시중의 주인공인 마하가섭 같은 인물이 그렇습니다. 그는 엄격한 수행과 계율을 중시한 인물일 뿐, 교학 대신 오로지 체험만 중시한 인물은 아닙니다. 교학이냐 선이냐, 하는 분간은 물론, 출가승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불교란 출가승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듣고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사회생활을 하는 재가 신자 또한 중요한 불교의 부분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불교를 출가승의 종교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고, 재가 신자들의 신앙 행위와 세계관은 뭔가, 잘못되거나 저급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단언코 말씀드리는데, 그건 그쪽 사람들이 하는 주장이고, 그 주장이 오랫동안 불교 연구에서 권력의 위치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을 해보시자는 말입니다. 중국이나 우리의 고려 시대에 출가승의 조직이 교학을 중심으로 하자는 쪽과 선을 중심으로 하자는 쪽으로 상당한 대립 관계에 있었지요. 그 가운데 선에 중심을 둬야 한다는 선종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거지요. 어차피 그들에게는 재가 신자들의 신앙 행위는 관심이 없고 권력을 차지해서 좀 더 큰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을 테니까요. 재가 신자들이 먹고살기도 바쁜 데, 그 와중에 가장 큰 관심은 기복이고 물질이고 왕생극락의 믿음인데, 교학이 어떻고 선이 어떻고 하는 논쟁에 누가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하지만, 특정한 종단이 인도 불교의 정통성을 차지하면, 재가 사회에 대한 영향력 확장은 불을 보듯 훤한 일 아니겠습니까?
염화시중의 세계, 그 원리는 분명히 초기 불교 안에 존재하는 세계임은 틀림없습니다. 다만, 부분일 뿐, 모두 다는 아니지요. 그 세계는 불립문자(不立文字) 혹은 교외별전( 敎外別傳)의 세계라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전자는 문자나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인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禪)의 핵심 정신을 담고 있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진리란 교학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체험으로도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두 선을 중시하는 세계관이지요. 이렇듯, 인도의 세계관은 특정한 부분이 전체 모두를 차지하지 않는 게 대부분입니다. "선과 명상과 깨달음을 중시하는 게 고대 인도 세계관의 부분"이라고 하면 그 규정은 맞습니다. 그러나 "선과 명상과 깨달음을 중시하는 게 바로 인도 세계관"이라고 하면 그건 틀린 규정입니다. 물질과 사회관계를 중시하는 세계관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져왔다는 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 뭔가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만 제외하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