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II. 붓다, 세상을 버리고 떠나다. 8. 차유고피유 此有故彼有


조지훈의 시, 낙화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하지요.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겉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어떤 행위의 원인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가 가깝고 먼 원인이 된다는 의미지요. 꽃이 지는 것만 그러겠습니까, 꽃이 피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연꽃 한 송이가 보기 좋게 피었다 칩시다. 왜 피었을까요? 누군가 씨앗을 심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면 그 씨앗만이 원인인가요? 아니지요, 물도, 흙도 심지어는 그 흙 속에 사는 지렁이도,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도 그 꽃이 피게 하였겠지요. 그 여러 가지가 봄이라는 계절에 맞을 때 피는 것이고, 겨울이라는 계절이 오니 지는 것이겠지요. 생명이 태어남도, 죽어 사라지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꼭 병이 들어서 죽었겠습니까?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했거나 너무나 미워했거나 일을 너무나 많이 했거나 일을 하지 못해 돈을 못 벌었다거나 하는 여러 행위 혹은 그 너머의 어떤 존재 혹은 그 너머의 또 다른 존재가 있어서 있게 된 것이라 보는 겁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이를 ‘차유고피유 此有故彼有’라고 합니다. 이것 즉 씨앗이 있으므로 저것, 꽃이 있다는 거지요.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유고피유’는 붓다가 고통을 비롯한 사성제를 설명하면서 그 토대로 연기의 원리를 설명할 때 쓴 빨리어 구절을 한자어로 그대로 번역한 것이지요. 붓다는 사성제를 알지 못하고, 연기법을 알지 못하면, 그 수행자는 진리를 모르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연기를 그가 깨달은 세계관의 진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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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와 불교 세계관인 산사라 즉 윤회의 기반이 되는 원리가 바로 이 연기지요. 이승에서 죽음은 다음 생에서 또 다른 삶이 되니, 삶과 죽음은 서로 의지하여 생긴 것이고, 그것들이 계속 작용하면, 그것이 바로 윤회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바로 이 상호의존의 연기법 속에서 삶은 죽음이고 죽음은 삶인 불이(不二)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지요. 그러하니, 바로 이 연기는 힌두교와 불교의 핵심 중의 핵심 원리입니다. 연기의 세계에서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요. 그러니 서로 다른 것 혹은 아무 관계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따로 분리할 수 없는 겁니다. 우주 전체가 하나도 떨어질 수 없이 상호 연결되고, 모든 존재가 서로를 조건 지으며 함께 존재한다는 거지요. 결국, 이 세계관에서는 하나가 곧 전부이고, 전부가 곧 하나가 되고, 그 원리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장에서 다룬 인드라망의 세계입니다.


거의 모든 불교의 개념이 그랬듯이, 이 연기 또한 그 출발은 힌두교의 우빠니샤드 철학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빠니샤드에서는 인간의 영원한 본질인 아뜨만을 무시(無始)하며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존재라 했으니, 곧 무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붓다는 이 원리를 조금 달리 해석하여, 아뜨만 혹은 브라만이라는 개체와 우주 모두의 영원한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와 상호 의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하고 그것이 윤회의 세계라고 설파한 것이지요. 힌두교에서는 그 아뜨만과 브라흐만을 깨닫는 것이 해탈인데 반해 불교에서는 그 연기의 세계가 고통을 낳고, 그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이루어지니 그것을 소멸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해탈이라고 달리 해석할 뿐이지요. 붓다가 깨닫고 제자들에게 처음 가르친 이 연기법은 세상 고통의 세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대승불교에서는 그 연기의 원리를 따르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쪽으로 해석이 달라집니다.


붓다가 깨달은 바의 토대 중의 토대가 되는 연기의 원리는 근대 유럽의 철학 특히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요. 베르그송이 붓다의 영향을 직접 받았는지 간접적으로 받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인도의 고대 세계관이 2,500년 후 근대 유럽의 철학에서 주목을 받았고 그것이 현대 인류의 사상에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고대 인도의 세계관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관 특히 생명과 존재를 둘러싼 세계관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연기법 위에서 힌두교와 불교는 모두 고정된 실체보다는 흐름과 과정에 중점을 둡니다. 소위 비실체론이지요. 베르그송의 철학에서도 지속과 생명의 흐름이라는 개념이 비실체론인데, 모든 존재란 고정되거나 정적인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것이 물 흐르듯 흐르면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연기론과 큰 틀에서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근에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일이 없어져, 주변의 많은 사람이 그 전공 교수를 채용하라고 강권했는데도, 더는 정치경제학을 통한 경제학 연구와 강의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의 뉴스를 들은 바 있습니다. 사회과학 혹은 수학으로 증명하는 것이 세상의 현상이나 존재를 설명하는 추세에서 대세가 되어버린 지금, 고대 인도에서 말하는 연기의 세계는 허무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조지훈의 시를 한 번 더 읊어보시지요. 꽃이 지는 게 바람이 불어서였겠습니까? 정치인 박지원이 감옥에 들어가면서 저 시를 읊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III. 붓다, 세상을 버리고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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