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II 붓다, 세상을 버리고 떠나다. 11. 다비 茶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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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80세에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유언을 통해, 인도 사회의 장례인 다비를 성대하게 치르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지요. 끄샤뜨리야의 법도에 맞춰 치를 뿐, 제자들이 그 일에 깊게 관여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겁니다. 이 말은, 지금의 논의에서 약간 벗어난 이야기지만, 그가 당시 사회의 카스트(바르나) 개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근거가 되지요. 물론, 그렇다고 그가 사회 밖에서 카스트 없는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다는 시도까지 폄훼해서는 안 될 겁니다. 아무튼 붓다는 제자 아난다에게 진정으로 공경과 존숭을 받아야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고, 자신이 남긴 법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을 치장해서도 안 되고, 예우할 필요가 없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당시 그는 왕은 물론이고 많은 백성으로부터 엄청나게 존경받은 큰 스승이었기에, 그리고 그렇게 큰 스승을 장례 하는 것은 당시 그들의 전통에 따르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 매우 성대한 의례임은 잘 알고 있던 터라, 그리고 그런 의례가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이고, 브라만 기득권자들에게 물질적 이득이 가고 백성들은 자신의 부를 빼앗기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제자에게 신신당부한 겁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들은 스승 붓다의 유언을 잘 따랐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튼 장례는 매우 큰 규모로 치렀습니다. 우선 장례는 그들의 전통인 화장으로 치렀습니다. 힌두교든 불교든 다른 종교이기 전에 인도 사회 고유의 전통입니다. 힌두교 전통에 따르면, 사람은 죽으면 영혼만 빠져나가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나지요. 그러면 육체는 매미가 벗은 허물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겠죠. 그래서 그것을 깨끗이 태워 뿌려버립니다. 이를 다비(茶毘)라 합니다. 산스끄리뜨어 ‘다하나(dahana)’를 한자어로 음을 따 번역하여 사용한 것이지요. ‘다하나’는 ‘태우다’라는 뜻으로 화장을 의미하지요. 참고로 몸은 죽어버린 시신이든 살아 있는 몸이든 태워버리고 난 후 나온 유골이든 모두 샤리라(sharira)라고 합니다. 이 ‘샤리라’를 한자어로 음차하여 사용한 게 ‘사리’가 되는 거지요. 그러니 다비를 한 후 거기에서 나온 구슬이나 보석 같이 영롱한 어떤 물체를 사리라고 하는 게 아니고 태우는 몸 그 자체를 사리라고 하는 건데, 뜻이 와전이 된 거지요.


태우고 난 후 유골은 붓다 이전부터 내려온 힌두교 전통에 따르면 강에 뿌리는데, 끄샤뜨리야 카스트에 속한 왕이나 위대한 스승의 경우 강에 뿌리지 않고, 그 유골을 수습하여 교차로에 묻고 그 위를 돌로 덮는 화장 후 매장의 양식을 선호했습니다. 붓다가 유언으로 자신 다비식을 끄샤뜨리야 법도에 맞춰 집전하라고 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다비 의례에 직접 개입 혹은 관여하지 않고, 끄샤뜨리야 전통에 따라 집전한 거지요. 여기에서 문제 하나가 발생할 여지가 생깁니다. 끄샤뜨리야 전통에 따르면 유골은 수습하여 스뚜빠로 묻은 후 그것을 숭배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붓다의 유골을 숭배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붓다의 가르침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절차만 전통에 따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숭배는 하지 않았어야 했지만, 그 전통으로부터 독립해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그 유골을 묻은 스뚜빠 즉 탑을 숭배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불교가 중국을 거쳐 동아시아로 들어올 때 그 유골 수배도 함께 들어왔는데, 동아시아 사람들은 ‘샤리라’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그 유골 가운데 영롱한 보석 같은 것을 ‘사리’라고 부른 겁니다.


붓다의 다비식은 본인의 뜻에 반하여,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붓다의 몸은 향유를 바른 후에 천으로 쌌는데, 기록에는 스물다섯 겹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비를 거행한 후 마가다국 주변 8개 세력으로부터 유골을 분배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의례를 주관한 쪽에서 거기에 응했다고 합니다. 이후 각 지역에서는 그 유골을 숭배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 탑이 84,000개가 되었다는 전설이 만들어진 거지요. 우리나라에 있는 진신사리 탑에 관한 이야기 또한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일 뿐입니다.


90년대 초 어느 날, 시대의 큰 스승 성철 스님이 입적했습니다. 스님은 다비를 성대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마침 혹은 하필, 비가 보슬보슬 온 일기 탓에, 다비는 간단하게 끝나지 않고 며칠 동안 이어졌습니다. 뉴스에서는 오늘은 성철 스님의 몸에서 사리 몇 과가 나왔느니, 어제는 어쨌느니 하는 식의 소식이 마치 중계 방송하듯 연일 흘러나왔습니다. 유골을 묻은 스뚜빠를 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내 기술로는 만들 수가 없어서였다고 기억하는데, 그들은 완전체 원의 형상으로 만든 돌 상징물을 세우기 위해 일본 기술자에게 주문하여 제작한 후 세워놓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종교란, 가르침입니까? 아니면 나 혹은 우리 자신의 이익입니까?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면 종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이 우리와 우리 아닌 쪽으로 나뉘고, 그 과정에서 의례가 강화하여 그 의례를 둘러싼 성과 속의 개념이 달라붙어야 종교가 되는 겁니다. 불교는 붓다의 다비 이후 완연한 종교가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불교를 실질적으로 세운 이는 붓다가 아니고 그 제자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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