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IV. 세상이라는 밭 3. 다나dana 布施
힌두교든 불교든 세상은 가치가 없는 것이니 버리고 떠나 궁극을 추구해야 한다는 세계관은 그들 세계관 전체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들에게 맞는 세계관으로 사는 것이고 – 물론 이것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뀌지요만 – 남은 사람들은 남은 사람들에게 맞는 세계관으로 살면 되는 게 그들 세계관의 전부지요. 어느 게 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니 힌두교를 혹은 불교를 부(富)와 멀리하는 혹은 무소유의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은 힌두교와 불교를 전혀 모르거나 사람을 속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불교를 중심으로 살펴보지요. 세상 안의 삶을 부인하는 초기 불교에서조차 재산과 재물을 부정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에 대한 집착이 있느냐 없느냐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재물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것으로 보았습니다. 아무리 재가자라 할지라도, 재산에 집착하거나 쌓기만 하면 재산은 고통의 원인이 된다고 했고, 특히 비구와 비구니는 재산을 소유해서는 안 되니, 무소유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재가자는 그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한다고 봤을까요?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이것이 다나dana 즉 보시(布施)입니다. ‘다나’를 음차하여 번역하면 ‘단월(檀越)이라 번역하기도 합니다만, 뜻이 없는 음역입니다.
’다나‘는 아주 간단히, ’주다‘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의 다나 즉 재물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반드시 재가 신자가 출가 승려에게 즉 신도가 절에 바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초기 경전을 보면, 부자는 재물을 다섯 가지 방식으로 써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자기 자신을 위해, 부모를 위해, 자녀와 아내를 위해, 친구, 친척, 동료들을 위해, 그리고 끝으로 공덕을 쌓기 위해 보시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번째 공덕을 쌓기 위해 보시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후 특히 사원에 보시하는 것이 크게 퍼졌는데, 다음 세상을 위한 좋은 업보를 쌓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고, 그 결과 사원에 돈이 쌓이는 방향으로 변질합니다. 그 좋은 예가 삼국유사에 있습니다.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의 전생 이야기인데, 엣날 엣날에 어떤 동네에 한 가난한 여인이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아들 대성이 10년을 넘게 어떤 주인집 노비로 일하고, 그 새경으로 밭 몇 마지기를 받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한 승려가 시주를 권하며, 시일득만배(施一得萬倍)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자기 어머니와 상의한 끝에 받은 새경 전부를 절에 바치고 모자는 게속 가난하게 살았답니다. 물론, 다음 생에는 복을 받아 불국사를 창건한 이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지요. 이런 이야기는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불교 승려들이 만들었을 텐데, 그들만 탐욕스러운 겁니까?
사실, 이 '다나'의 세계관은 고대 인도에서 발전시킨 인류사 초유의 공동체 경제 세계관이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현실 불가한 말이지만요.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경제관 또한 마찬가지 아닐가요? 인류 초유의 평등 경제관이지만, 현실 불가하지요. '다나'는 그 세계관이 내세 사상으로 연계되고, 그 안에서 출가자 승려들이 재물에 대한 탐욕을 쌓고, 재가자 신도들은 다음 생의 환생을 위한 수단으로 모든 걸 다 바치는 현상 때문에 현실 불가가 되어버린 겁니다. 인간이 탐욕을 버린다는 것 그 자체가 현실 불가한 것이라 그럴 겁니다. 그래서 붓다가 가르친 그 다섯 가지의 첫 세 번째가 자기 자신, 부모, 처자식 그리고 네 번째가 공동체 이웃이라는 사실, 공덕을 쌓기 위한 보시는 다섯 번째라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되어 버린 결과 때문이지요.
보시는 이처럼 초기 불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만큼 인도 사회는 소유와 재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게 역사적 팩트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에 와서는 재가 신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실천적 덕목 여섯 가지 즉 여섯 바라밀 가운데 맨 첫 번째 것이 됩니다. 그러면 보시 바라밀의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소유겠습니까? 소유가 중요한데, 탐욕을 위해 쌓지 말고 자신과 이웃을 위해 재물을 풀라는 것이겠습니까? 어려울 것도 없고, 해석할 것도 없는 명약관화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실천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나 즉 보시가 이렇게 중요한 위치에 서고, 출가자들은 반드시 그 재물로부터 멀어져 무소유를 유지해야 한다는 계율이 생겼고 그게 매우 중요한 위치에 섰다는 것, 자체가 고대 인도 사회가 너무나 부의 탐욕과 그로 인한 인간성 말살의 현상이 심해서였겠지요.
저는 부산에서 한 작은 반전평화 단체의 대표로 있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극도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긴급하게 원조하는 일을 하는 단체지요. 2009년의 일입니다. 캄보디아의 어느 아주 작은 국경에 인접한 가난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기아선상에 있어서, 우유, 계란, 밀가루 등 긴급 구호물을 편성해서 나눠주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매독에 걸려 아랫도리가 다 썩어가는 남자가 사는 길가 천막을 찾았는데, 그때 주위 길가 마을에 불교 승려 둘이 오더니 뭐라고 뭐라고 염불합디다. 그러자 사람들이 나와 곡식 한 주먹씩 보시를 합디다. 망치로 머리를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종교라는 게 도대체 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