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인도 세계관

by 이광수

IV. 세상이라는 밭 5. 라사Rasa 감정


힌두로서 이상적 삶을 추구하는 덕목들을 살펴보는 중, 물적이고 경제적인 아르타를 먼저 보고, 바로 전 글에서 사랑으로서 성애를 살펴보았습니다. 까마란 좁은 뜻으로는 요즘 말로 섹스를 뜻하지만 좀 더 넓은 뜻으로는 여러 즐거움의 감정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삶을 잠깐 돌아보면, 즐거운 감정 이전에 여러 가지 자연스러운 감정들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듯 합니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읽었던 안톤 슈낙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생각해보면, 요즘 그런 종류의 감정이 다 없어져 버린 듯하다. 분노는 있을지언정 슬픔은 없어진 듯한 혹은 슈낙이 말한 바대로 그런 서글픔과 아쉬움의 감정이 없어져 버린 듯합니다. 에릭 프롬이 지적한 대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데 그 안에서 뭘 하는지 알 수 없어요. 혹시라도 그 분주함과 실존을 구별하려 하면, 참,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닌다고 핀잔 듣기 일쑤지요. 세계 내 존재는 오로지 이성과 목적밖에 없습니다. 감성과 감정은 그 냉혹한 분주함의 정글에서 호사스러운 짓의 원천이고요. 그런 걸 느낄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말에 속된 말로 ‘아닥’되어버린 세상에 우리는 살지요.


고대 힌두교 안에 살던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지요. 선인 한 사람이 어떤 유명한 왕의 궁정을 방문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자신의 업적을 그 선인한테 자랑하고 싶은 왕은 그 선인에게, 저는 사원을 세우고 백성을 보호하며 도덕과 법을 잘 준수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가장 위대한 통치자겠지요? 그 말을 들은 선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위대함의 진정한 본질은 삶의 라사(rasa. 원래의 뜻은 ‘즙’ 즉 국적불명의 속어로 ‘엑기스’입니다.)를 이해하는 것을 통해 드러납니다, 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라사가 무엇인지, 신성한 연극을 통해 가르쳐 주었지요. 그 선인은 어느 사랑에 빠진 젊은 부부를 이야기로 환상 속 무대에 올려 왕이 보도록 했습니다. 부부의 사랑 이야기는 간난고초를 겪었으니 서로 사랑으로 의지하고 하나가 되어 그 역경을 이겨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왕은 그들의 순수한 서로에 대한 헌신에 감동했고, 사랑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니, 심지어는 우주까지도 연결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인도인들은 사랑을 아홉 가지 감정 즉 라사 가운데 으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전통적으로 꼽은 아홉 가지의 감정 즉 라사는 사랑 외에, 웃음, 분노, 슬픔, 용기, 두려움, 혐오, 경이로움 그리고 평온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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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라사를 중시하는 것은 유럽 문화의 모태가 되는 플라톤의 이성 중심주의와는 전혀 다르지요? 플라톤은 감성을 저급스러운 것으로 취급하고 이성과 논리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고 이끌어야 한다고 말해고, 이것이 후대의 기독교의 이분법과 만나 인간의 감정은 되도록이면 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지요. 그러나 인도에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랑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여러 감정은 인간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간주하여 수시로 백성들에게 그 중요성을 교육했습니다. 그래서 아홉 라사를 담은 이야기가 수없이 만들어지고 특히 사랑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넘쳐흐를 정도로 많고 아름답게 지어졌지요. 그 대표적인 사랑 이야기로 깔리다사Kalidasa가 지은 샤꾼딸라Shakuntala는 근대 유럽으로 그 이야기가 알려져 극찬받은 시로 된 이야기지요. 여러 감정을 중시하다 보니 그들은 예술적 표현이 매우 뛰어나게 발전했지요. 문학, 연극, 무용, 음악 등에서 감정과 분위기의 묘사가 아주 뛰어나게 발전하였으니 특히 연극을 통해 관객이나 청중이 심미적 즐거움으로 감동을 크게 받아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개인과 사회가 안정된다는 담론까지 생겨났습니다. 고대 인도의 연극 이론서인 나띠야 샤스뜨라(Natyashastra)가 바로 그 미학 저작입니다.


그들은 나띠야 샤스뜨라의 미학으로 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힌두교를 널리 강화하는 매우 뛰어난 교화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절대주 비슈누의 화신으로 가장 대중적인 신 끄리슈나의 사랑 이야기지요. 신화 속에서 끄리슈나는 여러 고삐 – 여성 목자라는 뜻으로 속된 말로는 여자 친구 혹은 연인이라 할 수 있지만, 끄리슈나가 절대주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성 헌신자라고 번역하는 게 더 합당합니다. -와 함께 밤새 춤추고 노래하고 물놀이하며 신성한 기쁨을 나눕니다. 신이 엄숙하고 근엄한 관계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감정적으로 기뻐하고 사랑하는 초월적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인간과 신이 하나로 일체화하는 감성적 신앙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를 박띠bhakti라고 하는데,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우리도 예전에 그랬지만, 명절 때만 되면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과 같은 이야기들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점령하다시피 했지요. 그것들을 보면서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면서 사는 우리네 삶을 반추하곤 했지요. 물론 모두 권선징악의 차원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들로 어찌 보면 지배 이데올로기의 일부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지금 우리가 주변 사람의 그런 감정을 존중하고 공감하는 문화가 갈수록 사라지고 메말라져 버린 세상에서 살다 보니, 그런 시절이 그리워지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남자는 태어나 세 번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말은 있지만, 인도에는 그런 말은 없습니다. 그곳에서 살아보면 그 사람들 참 따뜻하고 감정적이다, 라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면 그들을 그렇게 대해야 벗이 되는 거겠지요. 우리도 그런 면을 다 말려 비틀어버리지 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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