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VI.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니 2. 슌야따 Shunyata 空
이전 글에서, 힌두교 세계 내의 물질적 존재를 그들은 루빠라고 하는데, 그 루빠란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무한히 변화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영원하지 않은 것을, 그들은 무엇이라 규정할까요? 그들은 천변만화하는 그것을 비어 있는 것이라, 슌야따shunyata라고 부릅니다. 슌야따는 베단따 철학에서, 세계 존재 가운데 브라흐만-아뜨만이라는 영원한 본질이 아닌, 그냥 변화하는 것, 그것입니다. 우주 만물에는 브라흐만-아뜨만이 존재하는데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만물은 그 본질이 아닌 허탄한 변화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힌두교에서의 슌야따는 우리가 사는 뮬질 세계 즉 마야(幻)를 의미하지요. 그래서 마야란, 비어 있고, 비어 있으니 변화한다고 보는 겁니다. 이 슌야따 개념은 힌두교 우주론에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쉬울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처음 장에서 설명한 시간과 우주의 기원에 관한 몇몇 글에서 힌두 세계의 우주는 창조, 보존, 소멸의 순환 주기를 거친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소멸의 기간에 모든 형태와 존재는 파괴되어 사라지는데, 그때 우주의 상태가 바로 슈냐따인 거지요. 우주는 해체되고, 다음 창조를 기다리는 상태 그것이 공이지요. 베다에서는 이 공의 상태를 존재도 없고, 비존재도 없던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존재는 이 슌야따따에서 탄생한다고 하지요.
나중에 불교에서도 이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이 전개됩니다. 그들은 브라흐만-아뜨만이라는 영원한 본질적 궁극의 실체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그런 것은 없다고 인식하여, 세상 만물은 모두 영원하지 않은 허탄한 것이라고 인식합니다. 비어 있음을 변화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건 힌두교와 같은데, 힌두교에서는 변화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그마저도 없다는 것이지요. 이 슌야따 개념을 중국에서 처음 받아들일 때 그들은 그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없음을 의미하는 무(無)로 이해하려 했는데, 구마라집(344–413)이 공은 무가 아니라면서 공을 슌야따의 의미로 번역했지요. 그 공은 원래 노장사상에서 쓰이는 것이었는데, 그나마 힌두교-불교의 슌야따 개념을 담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차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슌야따를 불교 개념으로 인식하였으니, 스스로 존재하는 성격 즉 자성(自性)이 없이 인연으로 생겨난다는 의미로 인식하게 된 거지요. 그것이 공입니다.
이 슌야따의 개념이 중국에서 공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은 두 문명권에서의 생각이 비슷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꿈을 매개로 한 두 곳의 이야기를 한 번 비교해보도록 하지요. 힌두 신화에서 위대한 철인 군주인 자나까 왕은 어느 날, 자신이 거지로서 고통과 절망 속에서 방황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깨어나서 물었습니다. 꿈이 현실인지, 지금 깨어 있는 상태가 현실인지를 물은 거지요. 그 물음에 어느 신선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두 가지 모두 궁극적인 의미에서 실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둘 다 슌야따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하지요. 이 이야기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꿈에 나비가 되어 날아간 이야기, 어느 것이 '나'인지, 지금의 나인지, 꿈 속의 나비가 '나'인지 묻는 그 이야기와 비슷하지요. 힌두교의 이야기가 먼저 만들어졌기 때문에, 힌두 세계관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런 전파론은 너무나 편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보다는 양쪽 모두가 비슷한 세계관을 가져 발전시켰다고 보는 게 더 나을 것으로 봅니다.
이 슌야따 개념은 대승불교에서 크게 발전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널리 아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개념입니다. 색즉시공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개념으로, 모든 물질적·형상적 존재 즉 색은 고정된 자성(自性)이 없는, 연기(緣起)로 인해 생겨난 것이므로, 곧 공이고, 공에서 모든 존재와 감각이 나오니 곧 색이라는 의미지요. 불교에서 이 말은 모든 현상은 독립적 실체가 없고, 조건에 따라 생겨나는 것임을 뜻하니, 그것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란 있는 그대로 인식할 뿐,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지요.
힌두교와 불교에서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디지털과 사이버로 범람하는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작게는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SNS를 통해 올리는 사진이나 아바타는 실체가 있는 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데이터로 구성된 가상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사실도 생각해 볼 수 있을 테고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을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접하는 세계에서 무엇이 전쟁이고, 무엇이 게임인지, 전쟁을 게임같이 하는 것인지, 게임을 전쟁같이 하는 것인지를 분간하기 어렵게 되어 버린 현대인의 디지털 존재 문화를 통해 이 색과 공의 관계를 한번 깊게 성찰해 볼 필요도 있을 겁니다. 한 발 더 들어가면, 최근 넘쳐흐르는 AI와 휴머노이드를 보면서 메타버스와 같은 새로운 디지털 세계에서 인류는 과연 현실과 가상을 분리할 수 있을지,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래전 원효는, 원효(元曉, 617–686)는 색과 공의 관계를 화쟁(和諍)의 맥락으로 풀어냅니다. 색과 공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이라는 거지요. 서로를 통해 하나의 진리를 드러내는 관계로 이해하라는 겁니다. 이 화쟁 사상을 현대의 디지털 시대로 적용하여 생각해보면, 실체가 없는 공의 세계 안에서, 관계와 소통이라는 색의 작용을 이루어내는 게 이 시대가 요구하는 더 의미 있는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공함 덕분에 새로운 방식의 색이 드러날 수 있다고 보지 않으십니까? 고전의 가르침은 고전에 머무르지 말고, 지금에 변용하여 맞추어 살아야 하는 거지요. 그 안에서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