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I.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니 3. 따타따 Tathata 眞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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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김국환이라는 가수가 부른 ‘타타타’라는 가요가 있었습니다. 트롯트인데요, 작사가 양인자씨가 인도 여행 중에 영감이 떠올라 가사를 지었다고 하는 노래지요. 이렇게 시작합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뭘 모른다는 건지? 제목은 왜 ‘타타타’인지,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합디다. 저는 그 궁금증을 풀어주려, 불교 개념을 쉽게 설명하곤 했는데, 이 자리에서 한 번 더 풀어보지요.


우선 뭘 모른다는 걸까요?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란 끝도 한도 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본다는 말씀드렸지요? 올 여름 같이 제 아무리 여름이 더워도, 결국에는 언젠가 찬 바람이 부는 날이 온다는 거지요. 독재 시절 우리는 아무리 캄캄한 칠흑같이 어두운 밤일지라도 결국 내일의 해는 뜨게 되어 있다고 믿었듯이, 우리 사는 세상은 천변만화하는 게 이치인데, 그래서 그것을 슌야따, 즉 공(空)이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아침 이슬 같이 사라지는 것들이 어디로 가고, 다시 어디에서 오는 건지를 모르겠다는 것이 일차적인 모름이고,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건데, 왜 그걸 모르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이어지는 모름일 겁니다. 그 끝없이 변화하는, 도저히 어디로 어떻게 변화할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그 공의 세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인데, 쉽지 않습디다. 그 이치를 불교에서는 ‘타타타’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타타타’라는 어휘는 산스끄리뜨 어휘인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tatha라고 하는 어근에 ta라는 어미가 붙어서 만들어진 추상명사지요. 앞의 ‘따타’는 ‘그러한’이라는 의미고, 이를 한자어로 번역하면 여(如)가 됩니다. 여기에 ta라는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미가 붙었으니 둘이 합쳐 ‘그러한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 한자어로 그냥 ‘如’라 하면 되는데, 그게 평상의 한자어여서 인도에서 온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지 못할 것을 저어하여 그 앞에 ‘眞’자를 붙여 평상과는 다름을 강조하는 거지요. 그 ‘진여’라 번역한 어휘를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따타따’여야 하는데, 국어의 외래어 표기는 ‘따’와 ‘타’를 구별하지 않게 되어 있어서, 게다가 노래 가사로는 더 멋지게 들려서 ‘타타타’로 표기한 것일 겁니다.


이 ‘따타’에 대해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볼까요? 이제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 하나가 나옵니다. 바로 우리가 ‘여래’(如來)라고 번역하여 쓰는 ‘따타가따’라는 개념입니다. 붓다가 깨달음 이후 제자들에게 법을 설할 때 자신을 ‘따타가따’라고 부릅니다. ‘나’를 대신해서 쓰는 새로운 어휘인데, 동아시아에서 왕이 ‘나’ 대신에 ‘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겠지요. 그 뜻은 ‘그렇게 간 이’인데,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如去’가 됩니다. 그런데 단어 조합을 달리하면 ‘그렇게 온 이’ 즉 ‘如來’로도 가능합니다. 이 상황에서 중국에 전해진 대승불교는 살아서 역사하는, 즉 구원의 개념을 더 강조하기 위해 ‘여래’로 더 많이 사용하게 되지요. 여래이든 여거이든, 우리가 여기서 이해해야 할 건, ‘여’의 의미입니다. 그 ‘따타’라고 하는 ‘여’는 왜 붓다 그 자신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된 걸까요? 붓다는 세계를 바라볼 때, 모든 건 변하는데, 그것은 아무도 조정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전생의 인연과 업의 연기로 해서 생과 멸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 변함이 없음 혹은 ‘아뜨만’이라는 본질이 없음의 이치를 ‘나’ 스스로 주체적으로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이치를 ‘그러한 것’이라고 본 겁니다. 그러니 ‘따타가따’라는 말을 풀어보면, ‘억겁의 시간 속에서 작동하는 연기의 법칙에 따라 그 속에서 그렇게 가는 혹은 그렇게 오는 나 자신’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그 어휘 안에는 세계 천변만화의 이치 그리고 깨달음, 이렇게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으며, 앞으로는 ‘나’가 더 이상의 주체는 아니고 그 대신 ‘그 이치를 깨달은 자’가 될 것이라는, 의미도 함께 들어가 있는 겁니다. 학자에 따라서 이를 '나' 대신 쓰는 겸허한 표현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글쎄요, 저는 겸허 여부의 문제는 아니고 법을 설할 때 누가 설하느냐, 즉 주체에 관한 문제라고 봅니다.


이 두 예에서 중요한 것은 ‘따타’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이 책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의 주제를 잘 포함하는 의미로, 인도인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 가운데 하나지요. 따타따는 세계의 법 혹은 이치 혹은 진리를 개념화하는 것을 부정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렇다고 규정하여, 그것만이 옳고, 바르고, 합리적이고, 따라야 하고,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틀리고, 그러니 사(邪)의 존재이며, 그래서 물리쳐야 한다는 세계관을 부정하는 겁니다. 세계를 선과 악의 둘로 나누는 이원론을 배격하는 거지요. 위의 두 예 가운데 앞의 ‘따타따’를 보면 ‘따타’ 즉 ‘그러한’이라는 게 불가지론이나 허무주의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뒤의 ‘따타가따’의 경우를 보면, 그것보다는 상대주의 속에서 변화의 본질을 깨닫는 게 진리라는 게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가 더 적합할 겁니다.


대중가요 ‘타타타’를 들으면서 그 가사에서 받아들이는 건 사람마다 다 다를 겁니다. 저는 깨달음이나 선(禪)과 같은 종교적 의미보다는 규정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고, 편 가르기 하지 않는, 일단 있는 대로 그대로 바라보려고 하기를 삶의 자세로 취하려 하고자 합니다. 지금, ‘나’라는 존재가 변해버렸는데, 과거의 ‘나’가 내린 여러 평가와 규정, 그거 다 버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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