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I.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니 4. 인드라잘라 Indrajala 인드라網


환경 운동을 하는 분들이, 자연보호의 의미를 담아 내 건 개념 중 하나로 인드라망(網)이라는 게 있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존재가 다 망으로 연결되는, 소중한 존재이니, 자연을 착취하지 말고,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로 꺼낸 힌두교에서 기원한 불교의 개념이지요.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자연보호라는 의미로 쓰이지는 않았는데, 그분들이 그 원래의 의미를 전유하여 사용하는 겁니다. 좋은 일이지요. 우리에게 인드라망이라는 개념이 알려지게 된 것은, 오래전 고대에 불교가 전해질 때 화엄경을 통해서였습니다. [화엄경]에 실린 이야기에 의하면, 하늘에 있는 신들의 왕 인드라(Indra)의 궁전에 그물이 걸려 있는데, 그 매듭마다 영롱한 보석이 마치 아침 이슬처럼 달려 있답니다. 그물망에 걸린 각 보석은 다른 모든 보석을 비추어 서로 반사하고, 그러니, 한 보석 안에는 다른 보석의 모습이 반영되어 들어 있고, 그 보석의 안에는 또 다른 보석의 모습이 들어 있어, 결국 모든 보석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모습을 다 품고 있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는 이야기지요. 이를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고 한자어로 말합니다.

6-4. 인드라잘라,.jpg

이 세계관은 붓다가 깨달은 불교의 핵심 사상 중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이랄 수 있는 ‘연기’를 화엄경 방식으로 풀어낸 겁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즉, 독립적이거나 변하지 않는 본질 즉 아뜨만-브라흐만이란 건 없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게 서로 관계를 맺는 존재이니, 하나가 곧 전체이며,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의미지요. 우주 속 모든 사물의 상호연결성을 상징하며, 각 존재는 바로 앞글에서 말한, 따타따, 즉 그저 그런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상호연결성을 ‘인드라의 망’, 산스끄리뜨어로 인드라잘라Indrajala라고 부릅니다.


이 인드라잘라 이야기는 불교에서 처음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원래는 불교가 나오기 전에 편찬된 베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 베다에 나오는 의미는 불교에서의 의미와는 사뭇 다릅니다. 베다 시기에는 지금의 힌두교에 있는 절대 신 이슈와라(ishvara) - 추후 따로 다룹니다. - 라는 개념이 없었고, 각 신이 각자의 역할을 맡아서 하는 다신교 세계가 펼쳐진 시기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인기가 좋은 인드라는 적을 무찌르는 장군의 역할을 하는데, 폭풍우가 인격화 되었지요. 주로 소를 빼앗으려 전쟁을 하는 그 인드라는 폭풍우같이 휘몰아 적을 잡아 죽이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가 적을 붙잡기 위해 그물을 쳤지요. 그러면, 그 그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적은 아무도 없었고요. 그러니, 나중에 불교에서 발전한 모든 게 서로 연결되었다거나 영롱한 게 서로 반영한 건 이슬과 같이 덧없다는 그런 개념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 이야기가 베다에서 처음 만들어진 지 1000년 정도가 지나고 나서 붓다가 깨달았다는 연기 즉 상호 연결의 개념과 엮어지면서 확장하고 나아가서는 영원하지 않음, 즉 무상(無常)의 개념으로까지 확대되고, 아침 이슬과 같이 덧없는 마야(幻)의 뜻까지 포함되는 전혀 새로운 불교의 주요 세계관이 되었습니다.


대승불교에서 자리 잡은 인드라망 개념은 지금 우리가 사는 근대의 혹은 기독교의 세계관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지구의 주인의 위치에 오르니, 그 안에서 모든 사물의 존재 가치는 인간의 의도나 목적에 따라 결정되고, 그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것은, 절대 신이 정하는 로고스의 질서에 따라 필연적으로 혹은 섭리로서 일어나는 일이 되지요. 그것은 신의 뜻이고, 그것은 절대 진리라고 믿는 과학이 증명해줍니다. 이런 서구에서 만들어진 근대적 세계관은 우리네 사는 세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래도 불교의 일즉다 다즉일 즉 상호연계의 세계관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안에 사는 우리는, 니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니가 슬프면 나도 슬퍼지는 어떤 유기적 관계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지요. 이러한 정서를 잘 담은 시가 있습니다, 어렸을 적 우리 국어 교과서에 실린,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새긴 시입니다. 시인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나 울고, 천둥도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나 울었다는 겁니다. 그 노오란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시인은 잠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 그것은 인드라잘라의 세계관입니다. 꽃 한 송이가 피고 지는 것은 그 꽃만의 힘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존재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 인드라망은 한자어 사자성어로 해석되어 우리 정신 문화를 가꿔 왔습니다. 오래전, 가수 장은숙이 부른 ‘사랑’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은 바로 이 불교의 인드라잘라 개념이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사자성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 나아가 그것들을 포괄하는 시간이라는 것,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러니 뭔가로 한정되지 않음을 설명할 때 사용하지요. 이를 무상(無常)이라 말하면, 그것이 곧 공(空)이고, 그 공이란, 따타따 즉 ‘여’(如)의 이치라는 거지요. 이러한 '여'의 이치는 자연의 이치이고, 그것을 ‘사사무애’(事事無礙)라는 사자성어로 말하기도 합니다. 모든 사물과 사물 간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즉 막힘이 없어서 물 흐르듯, 빛 비추듯 서로 연계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노장사상의 상선약수(上善若水)와 연계되어 우리 문화를 빚어냈습니다. 이런 문화가 사라져간다고는 하나, 아직은 우리 안에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무더운 날 속에서 이렇게 찾아온 오늘 아침부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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