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I.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니 1. 루빠 Rupa 色


언젠가 아주 유행하던 유튜브를 하나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예쁜 여성이 있는데, 거울을 앞에 두고 화장을 지우기 시작하면서 본 얼굴이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지요. 화장을 다 지우고 나니 완전히 다른, 전혀 예쁘지 않다고 말들을 하는 그런 얼굴이 나와서 남자들이 댓글로 화장이 아닌 변장이라고, 사기라고까지 하면서 외모를 예쁘게 하는 노력을 폄훼하는 동영상이었습니다. 스스로 자기 얼굴을, 예쁘네, 못생겼네, 하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미적 세계관일 테지만, 꾸미고, 바꾸고 하여 자신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을, 높게 평가하는 것도, 또 하나의 미적 세계관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굳이 미학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전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본질적 이원론에 기반한 세계관에 가깝고, 후자는 힌두교와 불교의 만물은 변화한다는 불이 일원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세계관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따지는 건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고, 자신이 어느 쪽의 세계관 위에서 삶을 사느냐를 생각해 보는 게 더 의미가 있겠지요.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어가 버렸지만, ‘아바타’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힌두 세계관 – 나중에 단독으로 다룹니다. - 아와따라avatar 즉 화신(化身)을 주제로 하여 만든 영화인데, 주인공이 들어간 어느 행성에 사는 종족의 피부색은 푸른색이고, 산과 나무 등 세계의 모습이 우리와 거꾸로 된 모습이 여러 곳에서 등장하지요. 그러한, 세계의 모습을 힌두교에서는 루빠rupa라고 합니다. 불교를 통해서 번역된 한자어로는 색(色)이라고 번역하는데, 우리가 눈을 비롯한 모든 감각으로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모든 물질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 의미는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든 그건 자신이 판단해야 할 의미지만, 어쨌든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브라흐만이자 아뜨만인 그 본질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의미지요. 봄이 겨울이 되고, 낮이 밤이 되고, 삶이 죽음이 된다는 의미로 힌두교와 불교가 똑같이 받아들이는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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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빠 개념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럴 때마다, 힌두교 신학자들은 이야기를 만들어 그 개념을 쉽게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게 방금 위에서 언급한 아와따라 개념입니다. 이슈와라ishvara 즉 신은 절대적 존재인데, 그 존재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본질이라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도, 경험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것이라, 이해하고 경험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유한한 모습으로 변신하여 나타난다는 것이 아와따라 개념이지요. 절대 신 비슈누는 열 가지 아와따라로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는 거북이도 있고, 멧돼지도 있고, 도끼를 든 장수도 있고, 아주 잘생긴 청년도 있고, 철학자 붓다도 있습니다. 그러면 힌두교는 왜 그렇게 그렇게 모습을 달리하는 걸까요? 답은 아주 단순합니다. 세상이 변하니, 그 세상에 맞게 즉 사람들이 그 변한 세상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거지요. 궁극은 세계의 균형 회복 즉 악의 징벌을 통한 우주 질서의 회복이고, 그 궁극을 완수하기 위해 방편을 달리한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악극을 통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게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공동체 대신 개인 그것도 사이버 존재와 함께하는 개인이 사회 주체의 대세가 된 지금은 유튜브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변화를 세상 말세로 보는 사람은 본질론적이고, 세상 진보로 보는 사람은 현상론적인 거지요. 루빠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변신을 쉽게 받아들일 것이고, 그렇다면, 궁극을 완수하기 위해 잠시 외형으로 사람을 속이는 행위를 바람직하지 않게 보지만은 않을 겁니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들어보시지요. 태초의 바다에서 여러 신들과 악마들이 큰 싸움을 벌였습니다. 영생불사의 감로수를 얻기 위한 싸움이지요. 싸움에서 신들이 악마들에게 크게 밀렸고, 결국, 신들은 비슈누에게 도와달라고 구원을 청하게 됩니다. 이때 비슈누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악마들을 속이고, 결국, 신들이 이겨 불사의 감로주를 신들이 차지하게 만듭니다. 궁극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속이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의미지요. 그것뿐인가요? 비슈누의 또 다른 화신 끄리슈나는 정말 잘생기고 멋진, 요샛말로 하면 아이돌 같은 외모를 하고, 피리를 불고 춤을 추면서 숱한 여자들과 아주 야한 짓을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얻어냅니다. 내면도 중요하지만, 외면도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현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최고의 가치로 대두되는 시대가 왔는데, 아직도 고담준론을 주장하면서 사회의 변혁을 외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혹은 의로운 길로 가는 것인지 아닌지는 저는 모릅니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그런 주장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폭넓게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정치에서만 그렇겠습니까? 부모,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고, 교실에서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자라면) 예뻐지기 위해 성형 수술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뻐지기 위해 성형 수술을, 하는 여성을 폄훼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라는 시대에는 마음이 고운 게 미덕이지만, 얼굴도 예뻐야 여자지, 라는 시대에는 얼굴도 예쁜 게 미덕이고, 그 현실 속에서 제가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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