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사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VI.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니 7. 까루나 Karuna 자비
세상을 버린다는 것,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를 버린다는 것이지요. 내 새끼, 핏덩어리 내 자식을 버린다는 것이고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자던 사랑하는 아내, 남편을 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모든 걸 다 버리고, 자기 스스로 주체가 되어 세계의 궁극을 깨닫는 것이 붓다와 그 제자들의 길인데, 그게 시간이 가면서 바뀌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보통 독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늙으신 부모, 핏덩어리 자식, 또 하나의 심장 아내 혹은 남편을 버리기가 그리 쉽겠습니까? 그래서 못 버리는 사람들, 그렇다고 힌두교는 여러 가지로 별로 마음에 닿지 않아 자꾸 불교로 기우는 사람들이 석가모니 붓다 사후 500년 정도 지나는 동안 목소리를 내더니, 교리가 바뀌어버렸습니다.
세상을 버리지 못하니, 깨달음은 얻기 틀렸고, 그래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틀렸으니, 차라리 이 물질 세상에서 온갖 축복 다 받고, 죽어서 다음 세상 극락에서 환생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종교의 제1 소망이 되었지요. 그러니, 세상에서, 좋은 일 하고, 바른 일, 해서 선업을 쌓고, 악업을 지워내면, 다음 세상에 왕생극락하고, 살아 생전에는 온갖 복을 다 누리는 쪽으로 종교의 이상이 바뀐 거지요. 그러면 이런 걸 소망하는 이 불쌍한 중생을 어여삐 여기셔서 그 소망 온갖 것을 다 들어주는 신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야겠지요. 그래서 생긴 신이 관세음보살이고, 미륵보살이고, 지장보살이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중생의 소망을 다 들어주는 그 보살들을 관통하는 마음, 그게 뭘까요?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흔히들 말하는 그 네 글자의 핵심 키워드 ‘悲’ 혹은 ‘慈’와 함께 쓰여 ‘자비’로 번역되는 까루나karuna입니다.
까루나는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에서도 아주 중요한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감성인데, 종교 사회적 덕목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혹시, 비교가 가능하다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미덕이 사랑이라면 인도 종교에서는 바로 이 자비일 겁니다. 특히 대승불교에 와서는 이 까루나가 앞의 글에서 말씀드린 보살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필수 조건이지요. 2002년 드라마 [다모]에 나와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유명해진 말, ‘아프냐, 네가 아프니 내가 아프다’라는 말이 바로 이 까루나의 끝판왕입니다. 『유마경』(維摩詰所說經)에 나오는 말인데, 거기에서 중생이 아프면 같이 아프게 되는 마음 상태 그게 까루나, 즉 비(悲)라고 하였습니다. 넓게 볼 때는 슬픔이지만, 남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는 그리고 그것을 없애주려는 마음이 바로 까루나입니다. 자기는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지 않고 이 땅에 남아 모든 중생의 아픔을 덜어주면서 그들을 해탈시켜주겠다고 서원을 하는 감성이 까루나고, 그 서원을 하는 존재가 바로 보살이지요.
힌두교에서는 비슈누가 세계의 유지자로서 중생을 구원하기 위 아와따라로 여러 차례 세상에 내려오는 마음을 일컫는데, 불교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각 개인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연민의 실천자로서의 보살의 마음인 겁니다. 그래서 이 까루나는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고, 이 세상에 나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괴로움을 적극적으로 덜어주고자 하는 사회 실천적 연민인 거지요. 힌두교에서의 까루나가 신의 은총으로서의 구원 행위라면, 불교에서의 까루나는 개인 수행자가 실천하는 뭇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사회적 덕목인 겁니다. 불교는 이제 사회에서 사는 것을 고통이 아닌 가치 있는 것이라 보게 된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세상 안에서 사는 삶의 근본이 되는 까루나를 실천하는 걸까요? 붓다 사후, 그의 전생 이야기가 민간에서 만들어지는데, 그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그 행위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본생담이라고 번역되는 불경 [자따까]에 나오는 한 이야기에는, 옛날, 붓다가 자비로운 사슴 왕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강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 사슴 왕은 자신의 몸을 던져 그의 목숨을 구해줍니다. 사슴 왕은 남자에게 자신이 사슴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남자는 포상금 욕심에 눈이 멀어 왕에게 사슴의 존재를 고해버립니다. 사슴 왕은, 체포되기 직전 왕 앞에 나타나 자신이 바로 그 사슴이라고 밝히고 그 배은망덕한 남자를 원망조차 하지 않고 용서하고 미련없이 떠나버립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남을 구해주고, 그 은혜를 배신한 사람조차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는 연민, 그리고 아무런 집착도 미련도 없이 떠나버리는 것, 그게 바로 까루나라는 겁니다.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더 들어볼까요? 전생에 붓다는 큰 자비심을 가진 왕자로 태어났답니다. 어느 날 산중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어미 호랑이와 새끼들을 발견했는데, 그 호랑이가 자신을 먹지 않으면 곧 새끼들과 함께 죽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여, 자기 몸을 먹이로 내어주기로 결심했답니다. 처음에는 몸을 찢어 먹게 하려 했으나 호랑이가 기력이 없어 먹지 못하자, 스스로 벼랑에서 몸을 던져 호랑이가 먹을 수 있도록 했답니다. 까루나는 희생정신이 필수 덕목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행위는 끝도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포기하지 않는 연민, 지옥 중생이 다 구제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로 나타난 것이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정신입니다.
불교가 힌두교와 똑같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상정하면서 그들이 그 세상 속에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남의 슬픔과 고통에 함께 하는’ 까루나라는 사실에서 당신은 무엇을 읽으십니까? 떠나고 싶으나 떠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하는 수 없이 꾸역꾸역 이라도 살아가야 한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으로 저는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