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VII. 신들이 노는 세계. 7. 쁘라사다 Prasada 은총
힌두교에서의 예배 개념은 영적으로 기도하는 의미보다 더 우선으로 신에게 물질을 바치는 공양으로서의 개념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신이 그 공양을 올리는 신자들에게 내리는 은총의 개념이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겁니다. 이 은총을 힌두교에서는 쁘라사다(prasada)라고 부릅니다. 신에게 봉헌된 음식이나 물건이, 일정한 의식을 거친 뒤 다시 신자에게 돌아온 것을 의미하는데, 대개 먹을 것으로 오지요. 따라서 단순하게 보면, 사원에서 주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고, 좀 더 신학적으로 보면, 신이 축복을 담아 되돌려준 음식이라고 생각해야 할 겁니다. 그러니 ‘음식 나눔’이라는 사회학적 개념은 이차적 개념이고, 일차적 개념은 신이 자기 자신 개인에게 자비심으로 은총을 베풀어준 것이라 생각을 한다는 거지요. 그 음식으로는 랏두(laddu) 같은 과자나 빠빠드papad나 뿌리puri와 같은 빵 등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큰 사원에서는 밥, 달, 야채 등을 요리해 쁘라사다로 주는데, 신자들은 모두 홀 바닥에 다 같이 앉아 사원 측에서 나눠 주는 것을 받아 먹지요. 쁘라사다를 받을 때 사람들은 손을 모아 공손히 받는 게 예의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을 테고, 쌀 한 톨 버리지 않고 깨끗하게 손으로 싹싹 긁어 먹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겁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우리나라 절에 좀 다녀보신 분들은 절에서 하는 ‘공양’과 너무나 흡사한 광경이 떠오를 겁니다. 절에서 사원 측이 신자들에게 식사를 정식으로 제공하는데, 그것을 ‘공양’이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바로 직전의 ‘뿌자’ 글에서 말씀드렸지만, 공양은 신자가 신에게 올리는 것이고, 신이 신자에게 내리는 것은 쁘라사다라고 하니, 신자들이 절에서 식사하는 것은, ‘공양’이 아니고, ‘쁘라사다’ 혹은 ‘은총’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ᅟ겋지요. 어뜻 보면 충분히 일리 있는 의문 제기지요.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힌두교의 쁘라사다와 한국 불교의 공양은 모두 절에서 신자에게 주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부처에게 올리는 음식은 공양물이라 하는데, 이후 신자들이 하는 대중 식사는 음식 나눔의 차원으로 일종이 승려가 주는 보시를 나눈다는 개념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의 공양이지요. 사원 측이 신자에게 공양을 올리는 거지요. 그 안에는 힌두교에서와 같이 신이 주는 은총이나 축복 같은 영적인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불교에는 그런 기능을 하는 신의 개념이 힌두교에서와 같이 발달하지 않았으니까요. 불교에서도 신이 분명히 존재하긴 하지만, 이런 일상에 개입하는 기능을 하는 신의 개념까지는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학술적으로 비교하면 한국 불교의 ‘법회 후 공양 나눔’은 힌두교 쁘라사다의 사회적 기능과 거의 동일합니다. 하지만, 힌두교에서는 뭔가 물질을 바치면, 뭔가 은총을 신이 직접 내려준다는 영적, 개인 차원의 개념이 강하고, 불교에서는 뭔가를 바치면, 신이 은총을 내리지는 않고, 그 물질을 불교 공동체를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물질적 공동체 차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신학적 차원이고 현실적으로는 힌두교에서나 불교에서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으로부터 ‘복 받은’ 한 끼를 하고 오는 것이지요.
신의 일상의 개입이 아주 확실하고 분명한 힌두교에서는 그만큼 ‘쁘라사다’에 관한 믿음이 강합니다.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지요. 옛날 옛적에 어떤 청년이 살았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독실하게 쉬바를 믿는 사람이었지만, 16세가 되면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지요. 부모는 그 운명을 바꿔보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마땅치 않아, 마냥 슬피 살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할 수 있는 건, 쉬바 신께 뿌자를 드리는 것뿐이라며 매일같이 뿌자를 올렸지요. 어느 날, 뿌자를 올리고 났는데, 사제가 쁘라사다로 사탕 몇 알을 건넸습니다. 그 사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쉬바 신께서 너에게 축복하신 음식이다. 믿음으로 받아먹으면, 네 마음이 쉬바 신과 하나가 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그 청년은 사제가 건넨 쁘라사다를 두 손으로 공손히 맏으며, 눈을 감고 쉬바 신을 흠모했습니다. 그날 밤 죽음을 관장하는 야마(Yama) — 불교에서 말하는 염라대왕 — 신이 그를 데리러 왔는데, 그 청년은 쉬바 신상에 매달려 애원하면서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쉬바가 나타났고, 그의 삼지창이 야마의 올가미를 끊어 버렸습니다. 이어 쉬바가 말하기를 “내가 보낸 쁘라사다를 일념으로 받아들인 네 마음이 너를 나의 자식과 같게 만들었다. 너는 죽음을 넘어설 것이다.”라고 하였고, 이윽고 그 청년은 젊음을 간직한 성인이 되었답니다.
신에게 물질을 바치면 그 대가로 신의 은총을 받는다는 개념은 일단 그 신에 대한 의례를 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원을 살찌게 만들지요. 그것은 분명히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눈감고 신에게 의지하게 만들어 마르크스가 말하는 아편의 역할을 하게 할 겁니다. 그 문화가 사회학적으로 부의 재분배 차원에서 활용되는 것은 그 바친 물질의 양에 비해 볼 때 새 발의 피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다 알면서도 사원에 가서 그 신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은, 인간에게 닥친 불행과 재난 그리고 앞날의 불안이 개인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해결하기에는 너무 버겁기 때문일 겁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니체는 개인이 주체적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고, 기독교나 힌두교는 신에게 철저히 의지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누구 주장이 맞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각 개인에게 달려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