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VII. 신들이 노는 세계. 11. 샨띠 shanti 평화
요가, 많이들 하시죠? 요가란 원래 힌두교에서 하는 어떤 수행의 길을 의미하는 것인데, 중세가 시작될 무렵 이후 호흡법에 집중하면서 육체적인 수련을 하는 걸로 변했다가, 지금은 세계인의 건강을 위한 몸 단련 운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요가 수련을 끝내고 나면, 맨 마지막에 ‘옴 샨띠, 샨띠, 샨띠’라고 ‘샨띠’를 세 번 외우면서 마치지요. 여기에서 ‘샨띠’란 평화를 의미하는 산스끄리뜨 어휘입니다. 세 번을 외우는 것은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 그리고 우주 전체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을 상징으로 해서 그렇습니다. 나, 세계, 우주라는 세 영역을 포괄하는 건, 힌두교에서 널리 행하는 삼계(三界)라는 공간의 개념이니 쉽게 이해하겠는데, 왜 많고 많은 상태의 기원 중에 그들은 ‘평화’를 기원할까? 그 안에 담긴 맥락적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힌두교 고전 중의 고전, 삶과 정치의 경전 [마하바라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친구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복을 빌어주지 못할 사람도 아무도 없다. 친구가 되느냐 적이 되느냐는 오로지 자신의 이해관계에 달려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지요. 아마 인도 사람의 관계에 대한 가치론을 가장 잘 표현하는 알이 이 말일 겁니다. 관계는 세상 사는 사람들이 하는 일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사람들은 일상을 일편단심이 아닌 관계의 변화 속에서 살지요. 누구나 그렇지요. 그런 관계 속에서 뭔가 권력과 물질을 이루어내는 게 정치이니, 그 정치하는 사람은 철저히 자기 이익과 손해의 관계에 따라 변하는 겁니다. 그게 옳은지, 그른지를 평가하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려 있으니,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정치든 세상살이든 사람들은 변하는 세상의 이치 속에서 적과 동지의 관계를 수시로 바꾸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는 겁니다. 그러니, 정당 간의 관계든, 국가 간의 관계든, 그것을 고정된 틀로 고착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지요. 위험하다는 것은 갈등이 심해지고, 그 갈등을 줄이려면, 큰 노력과 에너지가 들어가고, 자칫 잘못하면, 큰 싸움이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서로를 죽이고, 증오하여, 삼족을 멸하는 비극보다 더 무서운 재앙은 없는 거지요. 그러니, 아무리 삼족을 멸하고 싶을 만큼 밉더라도, 그 두에 일어날 수 있는 더 큰 재앙과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틀로 고착화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고대 인도인들은 합니다. 언제든 상황이 바뀌면 그 관계는 변하여 원수가 사랑으로 바뀔 수 있는 이치를 안다는 거지요. 그 안에서 그들은 축복은 평화를 만들고, 비난은 싸움을 벌인다고 믿는 생각에서 세계와 우주의 모든 존재에게 갈등과 싸움을 멀리하는 평화를 축복하는 겁니다.
그들은 축복을 저주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우 크고 센 힘을 갖는다고 믿습니다. 그 축복이 단수한 기원이 아니고, 형식을 갖춘 의례의 일부로 성화(聖化)하는 언어로 사용하면 그런 기능을 한다고 믿지요. 그래서 ‘샨띠’를 세 번 낭송하고, 그 시작을 우주의 모든 힘이 하나의 에너지로 농축되어 담겨 있다고 믿는, 주문 언어인 옴(Om)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그들은 ‘옴, 샨띠, 샨띠, 샨띠’ 이 한마디로 갈등을 줄여 싸움을 벌이지 않고, 재앙을 차단할 수 있다면, 수백, 수천이 아닌 수 만 번이라도 낭송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이 세계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보내는 축복을 받을 수 있고, 그를 통해 그 미움과 복수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자는, 그래서 피 흘려 싸우는 것을 피해 보자는 소망이지요, 축복하는 것, 그것도 구체적인 게 아니고, 우주 삼라만상에 해주는 것이, 무슨 힘든 일이겠습니까? 적대적 관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상대를 저주하고, 죽이고 피 흘리는 일이 힘들지. 그래서 그들은 모든 존재의 축복을 비는 겁니다. 한 마디로, 원수의 관계로 고착하지 말고, 말로라도 언젠가에 올 수 있는 평화적 관계를 기원하자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옴 샨띠, 샨띠, 샨띠’는 뜻이 없는 혹은 굳이 그 뜻을 헤아릴 필요 없이 단순하게 낭송하면 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주문 즉 만뜨라(mantra)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는 바로 이 ‘샨띠’ 삼중 기도문으로 끝내고, 모든 의식은 이 삼중 기도문으로 끝내는 겁니다. 특히 [마하바라따]에 나오는 가족 간의 벌인 어마어마한 피 흘린 전쟁이 끝났다거나, [라마야나]에 나오는 주인공 라마가 모든 갈등을 다 극복하고 금의환향한다거나 하는 식의 일대 전환점에서 치르는 의식에서는 반드시 이 삼중 기도문이 등장하지요. 다시는 이렇게 피흘리고, 싸우고, 죽이고 하는 피흘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즉, 평화는 전쟁의 다른 말인 거지요.
굳이 우리 문화 속 개념으로 바꿔 말해 생각해 볼까요? 우리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를 한 번 떠올려보시지요. 그 이야기는 항상,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고 ‘잘 살았단다.’로 끝납니다. ‘옛날 옛날에’는 사실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고, ‘잘 살았단다.’는 소망의 기원이 되는 서사 구조지요. 우리는 그 ‘잘 살았단다.’라는 말로, 우리 사는 세상의 안녕과 번영을 소망한 것인데, 힌두 사람들은 ‘샨띠’ 안에 그 소망을 함축한 것이지요. 그 소망의 기원, 관계의 변화 속에서 잘 살기를 신에게 기원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신들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