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III. 기복, 그 순수한 바람 1. 뿌니야 punya 공덕


기독교의 구원과 불교의 구원을 비교하는 건 틀린 건 아니겠지만, 두 종교 이해에 그리 적절한 방법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구원이 차지하는 비중과 비슷한 수준으로 비교하려면 불교에서는 기복이 더 적절해서 그렇습니다. 불교는 초기 불교 일부에서는 세속의 모든 것을, 끊고 들어가는 절대 단계인 니르와나 즉 열반을 해탈하는 것이라 여겼으나, 대승 불교에 들어와서는 세속의 모든 가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해탈이라 봤습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세상 속 행위 즉, 업(業)을 쌓지 말아야 한다는 관점을 버리고 좋은 업을 적극적으로 쌓아야 한다는 태도를 택한 것이지요. 그 좋은 업 즉 선업이란, 사회 안에서 행하는 여러 도덕적인 일인데, 예컨대, 보시, 자비, 희생, 인욕 등과 같은 여러 사회적 행위도 있고, 죽은 귀신을 위무하는 공양을 잘 올려야 하는 의례도 있는데, 이런 행위 등을 통해 얻는 것을 뿌냐punya라고 합니다. 뿌냐는 산스끄리뜨어로 ‘공덕(功德)’이라고 번역하는데 원래 힌두교의 개념이었던 게 불교에 들어와서 불교의 핵심 개념이 되었지요. 이 공덕은 다음 생에서 극락으로의 환생의 근거가 되니, 구원의 관점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기독교의 구원보다는 세속의 삶에 초점을 더 맞추는 것이라, 생각하는 게 더 바람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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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더 중요한 개념이 하나 있어요. 이 공덕은 다른 이에게 전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행한 행위로 자기가 복을 받는 건 물론이고, 가족이나 자손에게 복으로 돌려준다는 개념으로 발전했다는 거지요. 힌두교와 불교의 시간 개념 즉 제1장에서 설명한, 무한대와 윤회의 시간 개념 속에서 꽃 핀 세계관이지요. 요즘 흔한 말로, 마누라가 예쁘고 착한 사람은 조상이 나라를 구했을 거라는, 농담에 나타나는 그런 복을 의미하는 겁니다. 기독교에서는 자기 믿음은 자기에게만 해당하는 것일 뿐, 그 믿음을 남에게 나눠줄 수 없지만, 불교에서는 자신이 콩을 심지 않았는데도, 조상님 덕에 콩이 나는 게 가능하다는 개념입니다. 조상님이 심은 콩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을 한다는 식으로 인과응보의 개념이 크게 확장된 겁니다. 이런 개념은 기원 초기 북부 인도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중국과 로마 사이에서 인도의 몇몇 나라가 실크로드 무역을 크게 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신용이라는 개념도 생기고, 송금이라는 개념도 생긴 국제 교역의 문화 속에서 생긴 개념이지요. 요즘, 절에 가면, 이와 관련한 모습을 흔하게 봅니다. 기왓장이나 연등에 가족 이름을 다 적어서 돈을 거기에 맞춰, 기부하면, 자신이 행한 그 기부 행위로 쌓은 공덕이 적힌 이름의 당사자에게 복으로 전이된다는 것이지요. 요즘같이 온라인 송금이 크게 발전한 세상에서는 아주 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이런 개념은 대승 불교의 《화엄경》에서 아주 잘 나타납니다. 《화엄경》의 주인공, 선재동자는 세상에 고통받는 이들을 보며, 어떻게 해야 진정한 지혜를 얻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구도자입니다. 그는 이전의 초기 불교에서 행했듯, 어느 한 스승 밑에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종류의 사람, 53명을 만나 그들로부터 산 지식을 얻으려 하는 사람이지요. 선재동자는 빈부, 귀천, 노소, 남녀, 신분 등으로 분별하지 않고 서로 연결된 인드라망의 세상 속에서 모든 행위를 존중하면서 끊임없이 배우지요. 붓다나 다른 수도승들이 행한, 손에 잡히지 않는 뭔가를 깨달으려는 태도를 부인하고, 세상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속에서 실천하는 행위를 통해 쌓는 것을 공덕으로 삼는 겁니다. 그 여정의 시작은, 어느 날 문수보살이 말하는 바에 이렇게 나오지요. “너의 마음이 청정하니, 53인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라. 그 공덕이 너를 극락으로 이끌 것이다.” 수행자가 추구하는 것은 붓다가 했던, 관념적인 게 아니고, 세상 속에서 여러 존재를 만나며 베풀고, 나누고, 참고, 계율을 지키고, 정신을 집중하는 등, 세상 속의 삶 그 자체를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 아미타불이 선재동자에 말하기를, 한없는 공덕을 쌓았으니, 이제 서방 극락정토로 왕생할 자격이 있노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공덕에 초점을 맞추는 거지요. 이야기의 끝이 구원의 개념과 연결되지만,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가 붓다가 했던 어떤 구원 관련 행위를 추구하라는 게 아니고, ‘지금 여기’ 이 세상 속에서 실천하라는 공덕 쌓기라고 보는 게 더 바람직합니다.


종교에서 물질을 추구하는 게 정신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열등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세상 안에서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 그리고 이웃 그리고 공동체의 안녕과 복을 위해 빌고, 기원하는 게 정신적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이러한 ‘기복’은 힌두교에서 시작해 불교로 이어지는 인도 종교 행위의 가장 중요한 핵심 세계관입니다. 버려야 하고 극복해야 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내 자식을 위해, 내 이웃을 위해 기왓장에 이름 적어 발복을 축원하는 그 마음이 왜 버려야 할 마음이 되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정신이 물질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옳고, 역으로 물질이 정신보다 더 우선이라고 여기는 것도 옳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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