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VIII. 기복, 그 순수한 바람 2. 수카와띠 Sukhavati 극락
불교에서는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자신을 위해, 모두를 위해 공덕을 쌓는 삶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긴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삶을 살면, 죽은 후 극락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는 말씀도 드렸지요. 그러면 이제는 그 ‘극락’이라는 게 뭔지를 말씀드려야 할 차례입니다. 극락은 수카와띠sukhavati라는 산스끄리뜨 어휘를 한자어로 번역한 겁니다. ‘수카’에 ‘와띠’가 합쳐진 말인데, ‘수카’는 ‘즐거움’, ‘안락함’ 등을 의미하는데 한자로 번역하면, 樂(낙)이나 안(安)으로 번역이 가능하겠지요. ‘와띠’는 ‘~이 (가득) 있는’이라는 뜻으로 조금 더 의역하면, ‘~이 있는 곳’으로 번역할 수 있겠지요. 둘을 합치면, ‘즐거움을 지닌 곳’, 또는 ‘안락함이 있는 땅’ 정도가 됩니다. 그래서 한자어로 때로는 ‘극락’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양’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요. 둘 가운데 더 널리 쓰인 단어는 전자 즉 ‘극락’이고, 여기에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합쳐 ‘극락왕생’을 가장 널리 쓰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극락은 이 개념이 처음 생겨난 기원 초기의 고대 인도 사람들이 생각할 때, 우주의 서쪽에 있고, 아주 깨끗한 곳이라 생각해 ‘西方淨土’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수카와띠는 인류가 지은 세계 어느 문화권에나 다 있는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이상향 가운데 하나지요. 천국, 유토피아, 무릉도원, 아르카디아, 샹그릴라 등이 그 좋은 예인데, 최근 한국 영화에서 표현한 ‘동막골’도 그런 이상향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겠지요. 이 극락은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에 묘사되어 있는데, 고통이 없는 세계로, 윤회의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 이해됩니다. 불교의 많은 개념이 힌두교에서 왔지만, 이 수카와띠 개념은 힌두교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힌두교는 이 세상을 끝없이 윤회하는 고통으로 보지 않았고, 그러니, 그것에서 벗어나는, 즉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세상을 고통으로 보고 벗어나야 한다고 본 것은, 붓다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붓다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윤회의 씨앗을 뿌리는 속세의 삶을 버리고 깨달음에 도달해야 한다고 봤는데, 그건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선, 이룰 수 없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해탈을 이루고 싶어 했으니, 세상 속에서 살면서 해탈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꿈꾼 유토피아는 윤회의 고통이 없는 곳이어야 하고, 붓다가 규정한 니르와나의 세계 즉 모든 욕망이 다 꺼진 무미건조한 상태가 아닌 온갖 기쁨과 안락함으로 가득 찬 곳으로 묘사한 것이 되어야지요.
경전에 그려진 극락의 모습을 한 번 보실까요? 땅은 흙이 아닌 금(金)으로 된 평지이고, 금, 은, 유리, 수정, 호박, 마노, 진주 등 7보(七寶)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 시대, 실크로드 국제 무역이 왕성하게 펼쳐지던 때, 그들에게 보석이 얼마나 중요한 재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극락에서는 자연의 소리조차 불법(佛法)을 설하고 있답니다. 바람이 나무를 스치면 스스로, 인생은 고통이니, 집착하지 말고, 모든 게 다 덧없이 무상하니 어쩌고 하는 가르침이 들린답니다. 요즘 절에 가면, 어떤 중저음의 남성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계속해서 들리지요. 그게 극락에서는 365일 밤낮없이 들린다는 거지요. 그러면서, 하늘에서는 항상 음악이 울려 퍼지고, 거문고, 피리 등 모든 악기가 어우러지면서 저절로 연주하는 곡조가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그곳에는 의식주가 저절로 생겨나니 그것을 마련하야 하는 노동을 할 필요가 없고, 그래서 오로지 즐거움과 안락함만 있다는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이 극락에 왕생하는 건 붓다가 했던 것처럼, 자식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모든 인연을 끊고, 수행을 힘들게 행해서 어떤 깨달음에 이르러야 가능한 게 아니고, 그냥 단순하게 아미타불의 이름을 신실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염불하면, 아미타불이 그곳으로 이끌어준다는 겁니다. [삼규유사]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볼까요? 광덕은 평생 단정한 자세로 아미타불을 염송하였으니, 죽어 바로 극락에 왕생하였고, 여성 노비 욱면은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밤낮없이 염불했는데,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염불을 멈추지 않았으니, 어느 날 법당으로 들어가 염불하라는 음성이 들려 법당으로 들어가 염불을 하니, 잠시 후 음악이 울린 뒤 서쪽 하늘로 솟구쳤답니다. 결국 그녀는 붓다로 변해 연화대에 앉아 승천했고, 음악은 공중에서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두 이야기는 극락왕생한다는 게 평범한 서민들에게 열려 있는데, 오로지 신심과 정진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즉 오로지 믿음 하나만으로 종교의 궁극을 이룰 수 있다는 새로운 아주 대중화한 교리를 보여줍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와 같은, 신앙 중심의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후 불교는 매우 빠른 속도로 동아시아로 전파되었고, 우리 삼국에서는 엄청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저는 극락이 있는지, 없는지, 저런 모습으로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는 것은 불교는 처음 시작한 붓다의 뜻과 달라졌고, 그 변화는 승려가 아닌 신자들이 물질적 즐거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겁니다. 그 승려들의 교리가 신자들의 욕망을 깡그리 무시하고 옛것을 원칙 혹은 근본이라 고집하지 않았다는 것도 큰 틀에서는 같은 말입니다.